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은 냉혹한 국제질서를 선악 이분법으로 보는 시각을 경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국제법상 '침략' 행위로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인식이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푸틴의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을 전쟁 명분으로 삼았다. 인접한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하게 되면 러시아는 중대한 안보 위협에 놓이는 게 사실이다.
때문에 중국과 손잡고 소련을 고립시켰던 헨리 키신저나 소련 봉쇄정책의 원조 조지 케넌조차 나토의 확대를 반대했다. 강대국을 너무 몰아붙이면 위험하다는 현실적 고려에서다.
이런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나토는 우크라이나 안보를 책임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크라이나를 이용해 러시아의 힘을 빼는 대리전 양상이 짙다.
박 소장은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붙는 것은 피하고 싶다는 것"이라며 "초강대국 국가원수로서 무책임하고 비겁하다"고 말했다.
"난민 260만 인도주의적 재난, 미국 뭐하나"…중국이 어부지리 얻을 수도
미국의 이율배반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어부지리가 될 공산이 크다. 러시아산 원유‧가스 수입금지 파장을 줄이기 위해 제재 대상인 베네수엘라는 물론 '주적' 중국에까지 손을 내민 것이다. 미‧중 외교 책사들은 14일 로마에서 만나 7시간의 내밀한 대화를 나눴다.박 소장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다독거려야 할 미국이 이렇게 엉뚱한 수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바이든의 오판으로 중국의 자신감만 커졌다"며 "대만 침공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시기는 앞당겨졌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푸틴은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공격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젤렌스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희생만 커졌죠. 그래서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외시 19회로 공직에 입문한 박 소장은 러시아 근무 경력만 11년에 이르는 정통 외교관 출신이다. '나침반이 잘못된 한국 외교' 등의 저서를 통해 퇴직 후에도 고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적 태도는 '친러파'라는 오해를 살 법도 했다. 지난 14일 인터뷰도 내내 열기를 띠었다. 그는 "한국은 10위권 국가임에도 여전히 소국 의식, 피해 의식이 있다"며 "이제는 당당히 국익을 앞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척진 사이도 아닌데" 정부 대응 아쉬움…명분‧국익 균형 중요
이와 관련, 미국의 맹방인 이스라엘이나 나토 회원국인 터키의 신중한 입장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는 "이게 외교력의 차이"라며 "(우리의 주력인) 대미 외교조차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대중 견제에 동참하라고 할 때는 그렇게 잘 버티더니 러시아에 대해서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그간 어렵게 일궈온 한러관계가 훼손되고 차기 정부의 대러외교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했다.
어찌됐든 우크라이나 사태는 앞으로 어떤 결말을 맺을지가 초미의 관심이다. 정보가 제한된 가운데 러시아 군사력과 제재 내구력에 대한 전망도 엇갈린다.
박 소장은 서방 주류언론의 시각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뒀다. 그는 "(전쟁 자체는) 시간이 더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했다. 주요 도시를 포위하면서 단전단수조차 하지 않는 이례적 전쟁 양상에도 주목했다.
제재에 얼마나 버틸지에 대해서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독일의 침략에 버틴 사례를 들며 서방의 기대와는 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지구상에 식량과 에너지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세계사적 의미마저 부여되는 상황에서 객관적 판단과 정확한 분석, 명분(정의)과 국익 간의 균형적 시각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