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수렁에 빠져든 러시아…아프간戰 답습의 조짐들

미국전쟁연구소(ISW)가 파악한 동부표준시 3월 6일 오후 3시(한국시간 3월 7일 오전 5시) 기준 우크라이나 전황
8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3일째 되는 날이지만, 여전히 전황은 지지부진하다.

졸전을 거듭하고 있는 러시아군은 어떻게든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계속 전력을 소모하고 있지만, 결사항전 의지가 강한 상황에서 장병들만 죽어나가고 있다.

누구도 전황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러시아에 밝지는 않다.

정규군끼리 대결이지만 게릴라전 양상도…민중 지지 못 받는 러시아군

이번 침공은 현대에서 보기 드문 정규군과 정규군의 대결이지만,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가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총력전을 벌이면서 실제로는 도시 지역을 기반으로 한 게릴라전 양상도 함께 띠고 있다.

본래 게릴라전은 힘이 약한 나라 민중들이 정규군을 상대하기 위해 벌이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이를 상대하는 데도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이를 대반란전(counterinsurgency)이라고 한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민중은 물이요, 게릴라는 물고기다"고 했는데, 다시 바꿔 말하면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서는 주민들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러시아군은 민간인 지역에 대한 의도적 공격 등 전쟁범죄를 여럿 저지르고 있다. 애시당초 명분이 없었던 침공과 함께 점령군으로 들어온 러시아군에게 우크라이나 민중들이 호응해줄 리도 없다.

국방대 박영준 교수는 2016년 논문 '미국의 대반란전 전략 전개와 한국 국방전략에의 함의'에서 "미군이 발간한 2006년 교범에서 대반란전을 수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건은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투쟁이라고 보았다"며 "이를 위해 현지 국가 군 병력뿐만 아니라 비군사적 기관들, 치안병력들과의 밀접한 협조가 필요하며 그 현지 기관들에 임무 위임도 필요하다고 보았다"고 썼다.

미군은 2001년 아프간전과 2003년 이라크전에서 수많은 피를 흘린 끝에 이러한 전훈을 얻었지만, 결국 아프간 전체를 안정화시키지는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련군 또한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가 장병들만 대거 희생시킨 뒤 철군한 적이 있다. 그렇게 당하고도 대반란전의 교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셈이다.

지난 2011년 탈레반 간부 무자히드 라흐만은 미국 뉴스위크와 인터뷰에서 "당신들에게는 시계가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시간이 있다"고 했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고 이 말은 10년 뒤 현실화됐다.

이미 러시아군 전사자 1만명?…미 국방부 "비축한 미사일 95% 소모"

게다가 러시아군 전투력도 빠르게 소모돼 가고 있다. 경제제재로 인한 타격과 만성적인 보급 능력 부족뿐만 아니라, 이미 투입된 자원들도 조금씩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영국 더 타임스는 7일(현지시간) 러시아 인권단체 굴라그넷 운영자 블라디미르 오세치킨이 러시아 국내정보기관 FSB 관계자 내부고발이 담긴 문서를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서 FSB 관계자는 이미 러시아군 사망자만 1만명에 달하는데, 주력부대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러시아 정부조차 사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반면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서 자국군 49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데 러시아군 병력 15만~20만 정도가 동원됐다고 관측되고 있다. 현대전에서 '전멸'의 기준은 병력 20~30% 손실이다. 1만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전사자만 계산해도 5~6% 정도로, 이미 적지 않은 병력이 희생됐다.
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제2 도시 하르키우(하리코프)의 거리가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초토화된 채 파손된 차량 등 각종 잔해로 가득하다. 연합뉴스

인명뿐만 아니라 다른 물자도 빠르게 소모되고 있다. 미국 CNN 방송은 6일(현지시간) 미 국방부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러시아가 현재까지 미사일을 600발 정도 발사했으며, 이는 비축분의 95% 정도라고 전했다.

600발이 비축분 가운데 95%라는 설명은 일견 납득하기 힘든 측면이 있지만, 식량조차 제대로 보급하지 못하고 있는 현 러시아군 상황과 구 소련 붕괴 이후 혼란상 등을 볼 때 가능한 일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편 이 고위 당국자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오데사에 근시일 내 상륙하려는 징후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오데사를 뺏기면 우크라이나는 흑해와 연결 통로가 막히게 돼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러시아 공군은 뭐하나?…"우리도 모른다"는 전문가들

러시아 항공우주군은 미 공군과 미 해군 항공대에 버금가는 강한 항공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전력을 제대로 쓰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전에서 항공기는 정찰, 공격, 수송 등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며, 처음 군용으로 쓰였던 1차 세계대전 이래 제공권을 뺏긴 군대는 대부분 패배를 면치 못했다. 그런데 현재 우크라이나 상공 제공권은 대부분 우크라이나 공군이 장악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군도 항공기를 통한 물자 보급 등이 필요하기에 수도 키이우 근처 호스토멜 국제공항을 점령하려 치열한 교전을 벌였지만, 점령했다가 탈환당했다가 다시 점령하는 등 격전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헬기와 수송기 등을 통해 움직이는 러시아 공수군(VDV)은 땅이 넓은 러시아 특성상, 다른 나라 해병대처럼 전략적 요충지에 빨리 투입돼 교두보를 마련하거나 상황을 조기에 종료하는 역할을 맡는다. 문제는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러시아군 헬리콥터가 미사일에 맞고 추락하는 모습. 페이스북 캡처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5일(현지시간) SNS를 통해 러시아군 헬리콥터가 지상에서 날아온 미사일에 맞고 추락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휴대용 지대공미사일(MANPADS)로 보인다.

MANPADS는 사람이 들거나 작은 차량으로도 운용할 수 있는 지대공미사일로, 그만큼 성능에는 제약이 있지만 빠르게 쏘고 도망쳐야 하는 게릴라전에는 알맞은 무기다. 미국은 이미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 반소 게릴라들에게 FIM-92 스팅어를 다수 공급했고, 이번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

스팅어를 발사하는 미 해병대원. 미 해병대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공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는 기본적으로 MANPADS보다는 전투기들끼리 싸움이 중요한 만큼, 러시아 공군이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는 전문가들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전쟁연구소(ISW)는 지난 3일(현지시간) 자체 분석 보고서에서 "러시아의 제공권 장악 실패는 매우 놀라운 일(very surprising)이다"며 "우리는 여기에 대해 지금은 어떤 설명도 제공할 수 없다(cannot offer any explanations for them at this time)"고 했다. 쉽게 말해 전문가들도 모른다는 얘기다.

다만 몇 가지 가능성은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기본적으로 러시아군과 같은 무기체계를 쓴다. 그다지 정밀하지 못한 러시아 무기체계 성능을 생각해볼 때, 러시아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공군뿐만 아니라 러시아 공군기를 격추시키는 골치아픈 일들이 생길 수 있다. 대규모 공군력을 동원해 도시를 폭격할 경우 서방측이 군사개입을 할 명분을 줄 수도 있다.

출구전략은 무엇?…뉴욕타임스 '3가지 종결 시나리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상황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불리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1일(현지시간) 이번 침공에 대한 3가지 종결 시나리오를 예상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인근 이르핀에서 피신하는 주민 모습. 연합뉴스

첫째로는 러시아가 침공 끝에 결국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고 친러 정부를 세운다는 가정이다. 뉴욕타임스는 "크렘린궁에서 아무도 푸틴 대통령에게 직언을 할 수 없는 여건을 고려할 때,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로 간주되고 있으며 실제로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했다.

이 칼럼은 "특히 푸틴 대통령이 이미 서구적 사고를 갖게 된 우크라이나에 친러 괴뢰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 무자비한 군사작전 외엔 대안이 없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대반란전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역량이 없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우크라이나를 완전히 점령하더라도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처럼 끝없는 수렁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러시아가 군사력으로 우크라이나를 몰아붙여, 우크라이나 쪽에 불리한 타협안에 합의하는 일이다. 국내외 여론이 모두 푸틴 대통령에게 불리하긴 하지만, 우크라이나도 피해가 큰 만큼 더 이상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불리한 타협안에 합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통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일을 막는 등 전략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애초에 이러한 방법이 러시아의 진짜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5일(현지시간) 러시아와 3차 협상을 앞둔 우크라이나 집권당 국민의 종 다비드 하라하미야 대표는 "우크라이나는 '비(非)나토' 모델을 논의할 준비가 됐다"며 "미국·중국·영국 그리고 아마도 독일·프랑스 등 나라가 직접 (안보를) 보장하는 모델도 가능하다"고 밝혔었다. 다만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가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이익이 무엇이 있을지는 불명확하다.
6일(현지시간) 러시아 제2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경찰이 자국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는 반전 집회 참가자를 연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 번째 가정은 러시아 국내에서 반푸틴 운동이 나타나 정권이 위기에 직면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시나리오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지금 당장 전쟁이 끝나더라도 러시아 경제는 단기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전형적인 독재자 스타일에,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해 측근들과도 가까이 만나지 않고 도감청을 우려해 스마트폰조차 사용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푸틴이 당국자들 조언을 들을지는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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