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주의 비판하는 北 자주노선, 왜 러시아는 예외인가?

주권국가의 자주성 옹호는 북한이 견지해온 외교노선의 대원칙이다. 소련과 중국이 북한 내 소련파와 연안파를 고리로 내정 간섭을 한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과 1960년대 내내 지속된 중소 분쟁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북한이 역사적으로 정립한 외교노선이 바로 자주노선이다. 소련과 중국의 대국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이 깔려있다.
 

北 자주외교노선에 배치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강대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사실 북한이 견지해온 외교노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럼에도 북한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유엔의 러시아 철군 결의안에 반대한 5개국 중 하나가 북한이다. 유엔 투표에 기권을 한 중국과도 비교된다.
 
북한이 자주 외교노선과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입장을 공개적으로 두둔하고 나선 데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외교 이익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규탄 결의안 표결하는 유엔 긴급특별총회. 연합뉴스

러시아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대응을 위해 유엔 안보리 회의가 열릴 때 마다 중국과 함께 공식 대응을 무산시킨 바 있다. 북한이 다음 달 15일 김일성 생일 110주년 등을 계기로 고강도 무력시위를 한다고 할 때 국제사회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옹호는 필수적이다.
 
러시아의 경제적 지원도 필요하다. 북한은 코로나19 비상 방역 속에 러시아와의 교역재개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북미 핵협상에 대비해 전략적으로 북러관계 강화

중장기적으로 북미 핵 협상 재개에 대비하는 측면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미 핵협상이 앞으로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개재될지 예측할 수 없으나, 북한 입장에서 러시아의 확고한 지지는 미리 확보해놓고 볼 일이다. 북미 협상이 기존의 비핵화 협상과 달리 비확산에 초점을 둔 핵군축 협상으로 진행될 경우 주변국들 간에는 북한의 기존 핵에 대한 인정 여부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러시아는 현재 미국과 이란의 핵 합의를 복원시키기 위한 협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란과 미국의 2015년 핵 합의를 복원시키는 최근 협상은 미국과 이란의 직접 대면 협상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독일, 중국, 러시아 등 5개국이 이란과 미국을 상대로 협상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국과 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의 전례가 있다.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 달 초 양국의 교역 재개와 '우크라이나와 조선반도 정세에 관한 국제적 상황'을 논의하기 위한 대면 협의를 각각 가진 데 이어 이달에도 추가 협의를 이어가는 등 양국의 우호 관계를 더 긴밀하게 다지는 상황이다. 두 나라의 전략적 이해를 도모하는 다양한 논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뉴스

北, 러시아 침공 적시 않고 미국 책임론 제기

북한이 러시아를 두둔하는 논리도 주목된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지난달 28일 "우크라이나 사태가 발생하게 된 근원"이 "미국과 서방의 패권주의 정책에 있다"면서, 러시아의 안보 환경을 거론했다.
 
미국과 서방이 "법률적인 안전 담보를 제공할 데 대한 러시아의 합리적이며 정당한 요구를 무시한 채, 한사코 나토의 동쪽 확대를 추진하면서 공격무기 체계 배비 시도까지 노골화하는 등 유럽에서의 안보환경을 체계적으로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리비아를 폐허로 만들어버린 미국과 서방이 이제 와서 저들이 촉발시킨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주권 존중'과 '영토 완정'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난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적시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사태'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약소국 침공의 정당성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사태의 원인을 미국과 서방에 돌리며 러시아를 두둔하는 어법인 셈이다.
 

러시아 안보환경 지적하며 北 핵개발·핵보유 정당화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본원인으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에 따른 러시아의 안보환경 약화를 거론한 것은 북한이 미국을 향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자신들의 안보 환경을 부각시키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뉴스1 제공

이는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등 전략무기 개발과 보유를 정당화하는 논리와도 연결된다. 북한은 북미 대화의 선결조건으로 한미연합훈련을 비롯한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 철회 등 근본문제의 해결을 주장하고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자체를 지지 한다기보다는 사태가 여기에까지 이르게 된 원인 제공자가 바로 미국이라는 책임론을 제기하는 것"이라며, "북한 대외정책의 초점은 모두 미국에 맞춰져 있다"고 설명했다.
 

北, 우크라이나·리비아·이라크 사례에 주목하는 이유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미국에 의해 '폐허'가 된 나라로 이라크와 리비아 등을 꼽은 것도 의미가 있다. 이라크와 리비아는 모두 핵을 포기한 뒤 미국의 군사작전 속에 후세인과 카다피 등 최고 지도자 처형과 함께 체제가 붕괴된 사례이다.
 
우크라이나가 지난 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뒤 핵무기를 일부 유지했을 경우 이번처럼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우크라이나, 이라크, 리비아 사례를 핵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반면교사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핵무기를 포기한 국가의 처참한 현실과 강대국 중심의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진상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며, "이런 현실과 진상은 북한으로 하여금 완전한 비핵화 입장에서 후퇴해 제한적 비핵화 또는 비핵지대화의 방향으로 선회하도록 추동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北 완전 비핵화에서 후퇴 가능성…남북미 2018년 체제 붕괴 의미"

이기동 연구위원은 "이는 인도와 파키스탄처럼 현존하는 핵무기를 인정받거나 핵군축 협상에 매달리는 방향"이라며, "6.12 북미공동선언과 4.27 판문점선언으로 형성된 2018년 체제의 붕괴를 의미 한다"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어떤 리더십을 보이는가도 북한으로서는 초미의 관심사일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이 당초 예상보다 장기화되면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위상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하락하는 양상이다.
 
미국의 압박과 대응 속에 러시아의 침공이 오히려 푸틴 대통령의 입지 약화로 이어지고, 상대적으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국제 리더십 강화로 나타난다면 북한의 추가 무력시위에도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1월 당 정치국 회의에서 핵 실험과 ICBM 시험발사 모라토리엄 철회에 대한 '신속한 검토'를 지시했으나 아직까지 검토 결과에 대한 추가 동향은 없는 상황이다.
 
북한은 오는 9일 남한의 대선 결과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진행과정을 보면서 후속 정치국 회의를 개최하거나 추가 무력시위의 종류를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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