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는 중국을 침략했던 일본군 탄압을 피해 항저우·광저우·창사·류저우·치장에 이어 충칭까지 옮겨다니면서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던 독립운동가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위한 뿌리가 됐다.
대한민국 국군도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였던 한국광복군을 계승했음을 공언하고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2018년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 "대한민국과 국군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광복군의 정통성 위에 건설됐다"며 "광복군은 자주독립정신을 대한민국 국군에게 물려준 군맥의 주체이며, 국군 또한 이러한 광복군의 법통을 계승함으로써 '광복군의 후예'가 되고자 하였다"고 명시했다.
문 대통령 "독립운동 기억하자"에 시작된 임정기념관…300점 유물 통해 임정 보여주다
이어 2019년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본격적으로 건립이 추진됐고, 이듬해 기공식을 거쳐 약 2년만인 올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개관하게 됐다.
기념관은 약 300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250점 정도는 타 기관이 소장한 유물들을 복제한 레플리카(replica)다. 임정기념관 측은 "소장하고 있는 전체 유물 수는 7252점이지만, 전부 다 바로 쓸 수 있지는 않고 추후 연구를 거쳐 추가 전시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임정기념관 측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정부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슬픔이 있어서, 그 분들을 제대로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주제로 개관 기념 특별전시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이어 2~4층에 세워진 상설전시실엔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정식 정부로서 활동한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어떠한 노력을 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는지 관련 사료들이 전시됐다.
3층에서는 우리나라 국회의 전신이자 임시정부의 국회인 임시의정원 관련 유물과 함께 상하이에서 항저우·광저우·창사·류저우·치장·충칭까지 옮겨다녔던 임시정부 여정을 기록하고, 2차 세계대전에도 연합군 편에 참전해 싸웠던 광복군 장병들의 노력이 유물을 통해 전시됐다.
실제로 임시정부기념관에는 1943년 8월부터 임팔 전선과 버마 탈환작전에 참여해 대적(對敵)방송, 문서해독, 포로신문, 선전잡지 발행 등 정보작전 임무를 맡았던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 활약이 관련 사진과 함께 전시됐다.
미국 중앙정보부(CIA) 전신인 전략첩보국(OSS)이 참여했던 이 작전은 해군기지·병참선·비행장을 비롯한 군사시설, 산업시설, 교통망에 대한 정보 수집, 시설 파괴와 주요 지점 점령, 차후에는 일본 진입까지 고려됐다. 작전계획서에 따르면 이를 위한 1차 진입 목표는 서울과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 등 한반도 5개 전략지점이었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임정을 공식 승인하지 않았고, 요인들은 그해 11월에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물론 시민들은 환영했다. 김구 주석 거처이자 환국 이후 임정 청사로 썼던 서울 서대문 근처 경교장은 인파로 붐볐고, 환국 행사가 열린 동대문 운동장에는 15만명이 몰렸다고 서울신문 등은 보도했다.
임정기념관 측은 초등학교 고학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전시를 구성했기에, 서대문 독립공원(서대문형무소) 근처에 가족들이 편하게 둘러보면서 독립운동을 기억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일반 관람은 3월 2일부터 가능하며 관람료는 없다.
"광복군 통해 임시정부 공고화, 임정은 독립운동 최고기관"
일각에선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끊임없이 일본군을 피해 다녀야 했다는 한계와 함께 서울 진공 작전의 성공 가능성, 인면전구공작대가 실제 교전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역할을 저평가하는 주장도 있다. 한 술 더 떠 임시정부가 했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이른바 '건국'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하지만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외교적 노력과 함께 문화·예술·선전 등을 통해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는 등 끝까지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한 결과로 우리가 독립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장제스 위원장은 그해 11월 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을 이집트 카이로에서 만나 한국의 자유 독립을 제안해 미국의 동의를 얻어냈다. 하지만 식민지 인도 문제를 염려한 영국 측과 격렬한 논쟁이 있었고, 최종 합의문엔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고 적혔다. 조건부였지만, 연합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것이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딸 지복영 애국지사도 여기에 자원했는데, 그가 참여한 징모 제6분처 초모공작 지휘자였던 김학규 장군은 훈련반을 설치해 교포 청년들과 일본군에서 탈출한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을 시켰다.
이들은 몇 달 동안 교육을 받고 희망하는 임무에 따라 광복군에 배치됐다. 일부는 현지에 남아 교육훈련을 맡거나 적지에 나가 다시금 지하공작을 벌였다. 1945년 3월 말까지 339명이 모이고 일제강점기 말 여러 무장조직이 합류하면서 군사작전을 계획할 정도 규모가 됐다.
그러면서 "광복군에는 일본군 출신, 청년단, 현지 교민들과 유학생 등 여러 계통의 사람들이 혼합돼 있었는데,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그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지 않았겠나"고 말했다.
김 지사는 자신이 쓴 글 '대한민국은 1919년에 탄생하였다'에서 "이른바 '건국' 주장은 헌법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적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위배되니 헌법 위반이고, 1948년 최초 관보 발행일 또한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돼 있으며, 임시정부가 독립국가 정부가 아니라면 스스로 독립운동을 폄하해 일본 극우파 인사들이 한국을 비하하는 궤변을 대변할 뿐이다"고 강조했다.
국사편찬위 김광재 연구관은 "광복군은 의병, 대한제국군,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계승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 여러 무장단체들의 통합을 강조했다"며 "무장력을 갖춘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지위를 공고히 했고, 그 결과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