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처럼 번진 고성 만세운동, 간성교회 성도들 있었다"[영상]

[3·1절특집 믿음으로 외친 독립]
①간성감리교회(차준만 목사)
강원 고성서 영동지역 최초 만세운동 일어나
이동진·함기석·류시국 목사, 박마리아 사모 이야기 조명
"민족의 역사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역사도 살펴봤으면"

■ 방송 : 강원영동CBS <3·1절특집 믿음으로 외친 독립>
■ 채널 : 표준 FM 91.5MHz, 91.9MHz(속초,고성,동해,삼척)
■ 진행 : 최진성 아나운서
■ 출연 : 차준만 목사(간성감리교회)

◇ 최진성> 3.1절 특집 믿음으로 외친 독립. 올해로 103주년을 맞는 3·1절.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나의 목숨을 잃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수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 중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독립운동에 동참했던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영동지역 최초의 만세 운동이라 할 수 있는 고성의 독립운동 이동진, 한기석 그리고 류시국 목사, 박마리아 사모의 이야기. 간성감리교회 차준만 목사님을 통해 들어봅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간성감리교회 차준만 담임목사. 최진성아나운서

◆ 차준만> 안녕하세요. 저는 하디 선교사님이 세우신 120년 된 간성 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차준만 목사라고 합니다.
 
◇ 최진성> 간성감리교회 역사적으로 어떤 교회인지 소개를 듣고 싶습니다.
 
◆ 차준만> 저희 교회가 생긴 지 올해로 햇수로는 121년이고 작년이 120주년이었습니다. 그래서 120주년사를 저희가 몇 년에 걸쳐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축을 시작하면서 5년 동안 준비를 하고 있고 올해쯤 되면 마무리가 되어져 갈 것 같습니다.
 
간성감리교회. 최진성 아나운서

◇ 최진성> 간성감리교회를 거쳐간 독립운동가 어떤 분들이 있을까요?
 
◆ 차준만> 저희 교회는 그 당시에 1918년 11월에 이 교회 파송을 받으신 류시국 목사님과 사모님인 박마리아 사모님 그리고 또 영동지역 최초로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 이 간성이고 고성군이고 이 고성군에서 가장 먼저 만세 운동을 실질적으로 시도했던 분이 이동진, 함기석 이 두 분인데 이분들이 다 저희 교회 성도였던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동진이라고 하는 학생은 1902년생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17세 학생이었고 당시에 이동진 학생은 개성에 있는 한영서원 곧 남감리교에서 세운 학교입니다. 그래서 이 간성 하리 출신인데 저희 교회가 위치한 곳이 하리입니다. 이분이 어떻게 해서 개성까지 갔을까 하면 이 분의 기록은 저희 교회상으로는 서기훈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동부연회에서 순교자로 북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서기훈 목사님이 저희 교회를 시무하실 때 '엡윗청년회' 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시고 전도 하셨는데 그때 함께 했던 분들이 이동진, 함기석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와 연관성을 가진 것을 알게 됐고 또 이동진이라고 하는 분이 고성 지역에서 그러니까 영동에서 가장 먼저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고 학자들이 그렇게 인정을 하고 있는데 그 영동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김동원이라고 하는 청년이 만세 운동을 시작했던 때에 독립선언서를 입수를 해서 3월 13일 등사해서 3월 14일에 길거리에 뿌리고 벽에 붙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3월 17일 이동진과 함기석이 간성초등학교 4학년 교실 입구에 이런 내용의 대자보 지금으로 말하면 대자보고 벽보를 붙입니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운동을 일으키니 문명 교육을 받은 자들은 누구라도 독립운동을 하여 만세를 부르자' 라고 하는 독립운동을 행하기 위해서 많은 이들을 격동하게 만드는 그러한 일을 벌여서 150여 명의 학생들, 전교생이라고 합니다.
만세운동 당시 간성보통학교 자리에는 현재 고성교육지원청이 위치하고 있다. 최진성아나운서
150여 명의 학생들이 만세 운동을 벌이기 위해 뛰쳐나왔는데 그때 헌병들에 의해 제지가 되고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 주동으로 이동진 학생과 함기석 청년은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이동진 청년 같은 경우에는 결국 6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확정 받습니다. 그리고 징역을 살게 되고요. 이분은 심한 고문으로 인해서 1970년대 까지 살아계셨는데 그때 이 분을 조사하기 위해 갔던 분들의 이야기는 극심한 고문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고통이 심해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정도가 되어졌다 라는 이야기가 있고요. 함기석 청년 같은 경우는 당시에 교장 선생님이 일본인이었답니다. 그 일본인 교장 선생이 헌병들을 설득하고 그래서 많은 학생들을 놓아주면서 함기석도 같이 풀려나게 되어졌다고 합니다.
류시국 목사. 최진성 아나운서

그리고 저희 교회 또 다른 독립운동 만세 운동에 참여하신 분이 이제 류시국 목사님 박마리아 사모님입니다. 이분들은 통천군 임남면 장정리 출신입니다. 통천군이 바로 지금의 고성군을 의미합니다. 이 고성군 출신으로 저희 교회에 1918년 11월에 일단은 파송을 받으셨고 류시국 목사님은 저희 교회에서 만세 운동을 하셨다기보다는 원산에서 3월 1일 만세 운동에 참여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가순 선생의 조선 독립에 관한 연설을 듣고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분이 고향에서 만세운동에 참여를 하게 되는데 그때가 4월 2일, 3일 이틀입니다. 그러니까 고성군에서 만세운동이 이동준에 의해 3월 17일에 시작되고 4월 3일까지 진행이 되었는데 그 끝부분에 류시국 목사님이 돌아와서 만세운동에 참여를 합니다. 그 당시에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분이 기독교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류시국 목사님의 판결문을 보면 그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모든 분들이 기독교인으로 표시가 되어 있고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 교인들 20여 명을 동원해서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100여 명이 함께 경찰서까지 행진하며 만세를 부를 때도 그때도 기독교인들이 주가 되어졌다고 알고 있고요. 그 일을 위해 태극기를 만들고 또 많은 교인들을 동원했던 것이 사모님인 박마리아 사모님도 함께 그 일에 동참해서 고성군지 또 고성에서 인정하는 역사 기록에 남아 있으신 분들입니다.
 
◇ 최진성> 민족 독립의 크나큰 역사 속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지역에 계신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고성 달홀공원에 있는 3.1운동기념탑. 최진성 아나운서

◆ 차준만> 우리 크리스천들이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존재들이고 또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그 생명을 뿌리기 위해 얼마나 직접적으로 생명을 걸고 수고했다는 사실을 후세들이 잊어버리고 있지 않은 건가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역사를 다시 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또 기독교인들의 역사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이 우리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과 같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한계를 내는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면 우리 선배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들이 생명을 걸고 무엇을 했는지 그걸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임하도록 만들기에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걸 바라볼 때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들이 부끄러워질 것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고 그걸 통해서 다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다면 그 또한 우리에게 굉장히 소중한 추억이고 또 기록이고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기억을 잊지 않는 자, 그 기록을 잊지 않는 자들이 결국은 승리하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 안에 승리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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