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22 베이징 올림픽 취재 뒤에 담긴 B급 에피소드, 노컷뉴스 '베이징 레터'로 확인하세요.
요즘 피겨스케이팅이 한 선수 때문에 뜨겁습니다.
주인공은 바로 카밀라 발리예바(러시아올림픽위원회). 도핑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 출전했습니다.
16일 밤.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선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이 열렸습니다. 한국은 '김연아 키즈'로 첫 올림픽 무대를 밟는 유영과 김예림(이하 수리고)이 출전했죠.
이날 경기장에는 전 세계 취재진이 총출동했습니다. 지금까지 캐피털 실내 경기장에 자주 왔지만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취재진이 온 적은 드물었습니다. 대부분 자국 선수들의 경기를 취재하니까요.
이번엔 달랐습니다. 현 여자 피겨의 1인자이자 이슈의 주인공, 사건의 주인공이 나타난 것이죠.
발리예바의 웜업이 시작됐습니다. 발리예바는 유영과 같은 5조에서 몸을 풀었습니다. 누가 봐도 점프가 남달랐습니다. 팽이처럼 돌아가는 스핀, 높은 점프력.
피겨스케이팅을 잘 모르는 사람 누가 보더라도 잘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몸을 풀 때는 넘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완벽했죠.
본격적인 연습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발리예바는 키릴 리히터의 '인 메모리안'에 맞춰 첫 점프인 트리플 악셀을 시도했지만 크게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웜업 때는 완벽했는데 부담이 됐나 봅니다.
짧은 연습이 끝나고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오후 7시부터 쇼트프로그램이 열렸지만 발리예바의 경기는 약 4시간 뒤인 오후 10시 52분 시작이었습니다.
그사이 공동취재구역(믹스트존) 추첨이 있었고 한국은 5명의 기자가 당첨됐습니다. 재미난 점은 러시아 취재진은 3명이고 일본 취재진은 16명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 취재진 13명, 독일 취재진 8명, 영국 취재진 6명 순으로 많았습니다.
경기장은 취재진으로 가득 찼습니다. 중국이 관중을 허용했지만 이날은 관중보다 취재진이 많았습니다. 경기장 한쪽 취재진으로 가득 찬 장면은 장관이었죠.
추첨에 뽑히지 않은 저는 발리예바 공연 전 미리 믹스트존으로 이동했습니다. 선착순으로 주는 임시 티켓을 받고 믹스트존에서 모니터로 경기를 보면서 대기했습니다.
발리예바의 경기가 다가오자 저처럼 미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대부분 외국 취재진이었죠.
모니터를 보는데 딱 봐도 불곰국(요즘 젊은 친구들을 러시아를 불곰국으로 부르더라고요) 기자 3명이 한국 기자들 주위로 왔습니다. 한 명은 전형적인 불곰국 체형의 거구였죠. 셋은 러시아 말로 계속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발리예바의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셋은 발리예바의 공연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첫 점프 트리플 악셀에서 발리예바가 실수를 하자 불곰국 1번 기자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발리예바의 클린 연기가 나올 때는 불곰국 2번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죠. 불곰국 3번 기자는 계속 소셜미디어(SNS) 텔레그램으로 무엇인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발리예바의 공연이 끝났습니다. 발리예바는 펑펑 울었죠. 서럽게 울었습니다. 불곰국 취재 3인방은 발리예바를 인터뷰하기 위해 준비된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꼭 인터뷰를 따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습니다.
다음 경기는 대한민국의 차례. 그런데 유영이 경기를 하는 중간 발리예바가 믹스트존에 등장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압권입니다.
여러분 영화 '겨울왕국' 보셨죠? 엘사가 주변을 얼어붙게 만드는 장면 기억하실 겁니다. 밝았던 분위기가 한순간 차갑게 변하는.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나 코믹스 마블의 캐릭터 중에도 주변을 얼어붙게 만드는 캐릭터가 등장하죠.
딱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발리예바에게 질문하기 위해 모인 취재진은 모두 얼어버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발리예바가 인터뷰를 안 해줄 것을 알았던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발리예바의 표정에서 냉기가 넘쳐흘렀죠. 눈빛도 싸늘하다 못해 사나웠습니다.
발리예바는 인형을 껴안고 취재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빨리 믹스트존에 나온 것을 보면 앞서 방송사 인터뷰도 하지 않은 듯했습니다.
외신 기자만 약 3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이 때 단 한 명의 기자 용기를 냈습니다. 불곰국 형님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시아 기자는 아니었습니다.
"발리예바…"
큰 목소리도 아니었습니다. '제발 발리예바 가지 말고 도핑 이야기좀 하자'가 함축된 것이었죠.
그러나 발리예바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습니다. 빠른 종종걸음으로 구불구불한 믹스트존을 빠져나갔습니다. '퍼스트 펭귄'이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취재진은 엄두도 못 냈죠.
믹스트존 출구 앞에는 모니터가 있었습니다. 유영의 경기가 생중계되고 있었죠. 발리예바는 힐끗 모니터를 한 번 볼 뿐 아무 말 없이 믹스트존 밖으로 나갔습니다.
허탈한 웃음부터 놀라움, 무표정한 얼굴까지. 취재진의 반응도 다양했습니다.
진짜 피겨 무대에 빌런(악당)이 탄생한 것일까요? 17일 프리스케이팅 때 믹스트존도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