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인 15일에는 경기 남양주 마석의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고인의 추도식이 열렸고, 추모 산문집 <백기완이 없는 거리에서>도 출간됐다고 한다.
고인의 1주기를 앞둔 지난 8일에는 노동자와 시민운동가 등이 모인 가운데 '백기완노나메기재단'출범식도 열렸다.
"노나메기"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뜻하는 것으로 선생이 가장 힘주어 외쳐 온 말이다.
늘 추상같은 목소리로 '사자후'(獅子吼)를 내뿜던 선생은 돌아가셨으나 그 분과 함께해 온 이들이 선생의 뜻을 계승한다고 하니 반가울 따름이다.
재단은 창립 첫 문화행사로 '백기완을 사모하는 화가 18인전'을 16일 개최해 오는 3월 17일까지 이어갈 방침이다.
전시장소인 서울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는 선생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이자 재야 민주인사들이 시국선언문 등을 썼던 뜻 깊은 장소로 이번 기회에 겸사겸사 둘러보면 좋을 듯싶다.
한국 현대사에서 '큰 어른'이자 '거리의 투사'였던 선생은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50년대부터 농민·빈민 운동을 시작했고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첫 위반 사례로 체포됐다.
이후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는 등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팔순이 넘은 고령에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김용균 노동자 사망 등 최근까지 굵직한 사회 현안마다 시위 현장을 지켰다.
선생은 민중의 삶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어 좋다며 유독 순 우리말을 즐겨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때로는 옆 사람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순 우리말을 사용해 주변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도 했으나 '달동네·새내기·동아리' 등은 사회에 잘 안착해 지금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 됐다.
대표적인 민중가요 '님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역시 선생의 '묏비나리'라는 시에서 유래됐다.
하얀 모시적삼에 선 굵은 얼굴, 멋진 백발을 휘날리며 거리를 활보하던 선생이 떠난 지 한해가 흘렀으나 고인이 꿈꿔 온 '노나메기' 세상은 여전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다.
고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 한 가지가 있다.
1993년 당시 재야 단체가 운집해있던 종로5가의 동대문 경찰서(현 혜화 경찰서)를 출입하던 사건기자 시절 선생을 인터뷰하기 위해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았을 때다.
가뜩이나 긴장한 데다 느닷없는 질문에 멍하니 쳐다보자 "이런 무더위 속에 가방을 메고 비지땀을 흘리며 취재를 다니는 젊은 기자를 보니 기분이 좋아요"라며 빙긋이 웃었다.
이 한 마디에 큰 어른을 인터뷰한다는 신참 기자의 긴장감은 사라졌고 한 시간 가량 선생과 나눈 이런 저런 얘기와 그 당시의 기억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