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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훈련에 나선 대한민국 쇼트트랙 대표팀.
대표팀의 최고참 곽윤기(34·고양시청)는 훈련 중 후배들을 경기장에 불러 모았다. 군기를 잡는 게 아니었다. 올림픽에 나서는 후배들을 위해 직접 사진을 찍어줬다.
사소하지만 올림픽이라는 중압감 때문에 놓칠 수 있는 것이었다. 올림픽 경험이 많은 곽윤기는 후배들이 이번 대회에서 추억을 남길 기회를 놓치지 않게 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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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윤기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중국 선수들과 옷깃만 스쳐도 좋지 않은 판정이 나올 수 있다고 예고했다. 그러자 중국 팬들은 곽윤기의 인스타그램에 몰려와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
곽윤기의 예상은 현실이 됐다. 5일 열린 쇼트트랙 혼성계주 준결승에서 중국은 편파판정 논란 끝에 결승에 올랐고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곽윤기는 6일 취재진 인터뷰에 나섰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의 의미에 대해 허무한 감정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들이 상처받지 않고 기죽지 않게 응원해 달라"고 당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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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쇼트트랙 대표팀의 훈련. 여자 선수들이 3000m 계주 훈련 중이었다. 여기에는 곽윤기도 있었다. 후배들의 주자 교대 연습을 도우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곽윤기는 바로 옆에서 트랙을 같이 돌면서 자세에 대해 큰 소리로 피드백을 해줬다.
훈련 후 김아랑은 곽윤기에 대해 "진천선수촌 때부터 훈련이 끝나고 선생님들도 다 가셨는데도 연습을 도와줬다"고 말했다. 특히 계주가 처음인 이유빈, 서휘민은 경기 중 놓칠 수 있는 것들을 피드백 받았다.
김아랑은 "어떻게 보면 선생님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윤기 오빠가 많이 알려주고 가르쳐줘서 후배들도 많이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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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편파판정 논란 끝에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 황대헌과 이준서가 1000m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선수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린 선수들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선수들은 공동취재구역(믹스트존) 인터뷰에 나서지 않았다. 이날 중국 런쯔웨이는 편파판정 논란의 수혜자가 돼 금메달을 땄다.
8일 훈련 후 이준서, 최민정, 김아랑, 박장혁, 황대헌 등 선수들 대부분이 취재진 앞에 섰다. 이들은 편파판정의 논란을 뒤로하고 앞으로의 경기에만 몰두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어려운 순간 후배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냈던 곽윤기는 이날 취재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한마디 해 달라는 취재진의 요청에 "오늘은 그냥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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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쇼트트랙 훈련장. 곽윤기와 김동욱은 11일 남자 5000m 계주 연습에 매진했다.
그는 런쯔웨이의 금메달 획득 상황에 대해 "역대 올림픽 최고의 오심은 아폴론 안톤 오노 선수의 2002년 솔트레이크 대회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아마 이번 올림픽으로 그 순위가 바뀌었다"면서 일침을 날렸다.
취재진이 곽윤기에게 물었다.
"예전에는 곽윤기씨가 대표팀에서 까불까불한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이젠 대표팀에서 없어선 안 될 듬직한 맏형이 됐습니다. 후배들이 윤기씨에 엄청 의지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곽윤기는 당황한 듯 잠시 생각을 했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말을 시작했다.
"제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해낼 것이라 믿어요. 후배들 마음가짐이나, 지금 경기를 준비하는 태도를 보면 제가 사실 큰 역할이 된 건 없어요."
자신을 낮춘 곽윤기는 한국 팬들에게 자신을 그렇게 봐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생애 세 번째 올림픽에서 태극마크와 이별할 준비를 하는 곽윤기. 후배들과 함께하는 그의 마지막 쇼트트랙 5000m 계주 레이스가 11일 오후 베이징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