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환(22·고려대), 하뉴 유즈루(일본), 네이선 첸(미국) 등 세계 최고의 남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경기를 펼친 10일 오전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
피겨스 남자 프리 스케이팅이 열린 경기장은 오전 9시부터 각 국가에서 몰려온 기자들로 꽉 찼다. 세계 톱스타들의 경기와 함께 메달 결과까지 나오는 일정인 만큼 관심이 높았다. 공동취재구역(믹스트존) 추첨 경쟁도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하뉴의 경기가 끝나자 경기장에 있던 취재진은 믹스트존으로 향했다. 이날 하뉴는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쿼드러플 악셀에 도전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래도 하뉴는 경기 후 바로 1위로 올라섰다.
믹스트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취재진이 모여 있었다. 특히 중국과 일본 취재진이 가장 많았다. 하뉴에 앞서 중국의 진보양 경기도 끝난 터라 믹스트존 한 쪽은 이미 기자들로 꽉 찼다.
경기장 관계자들도 이 정도로 많은 인원에 당황했는지 마이크와 스피커를 점검하며 하뉴가 오길 기다렸다. 좁은 믹스트존 탓에 사실상 거리 두기는 불가능한 상황. 관계자들도 이번엔 거리 두기를 하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중국 취재진은 단순히 진보양만을 기다린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기자들이 하뉴의 인터뷰를 대기했다. 믹스트존에서 올림픽 자원봉사를 하는 중국 대학생에게 물었다.
"여기 중국 취재진이 많은 데, 하뉴가 중국에서도 인기가 많나요?"
"네. 하뉴는 중국에도 팬이 많이 있어요."
잠시 뒤 진보양이 먼저 나왔다. 진보양이 믹스트존 인터뷰를 하는 순간 차준환의 프리 스케이팅 경기가 시작됐다. 중국 취재진의 눈이 진보양으로 향한 순간 일본 취재진은 다른 곳을 바라봤다.
일본 취재진은 믹스트존에 마련된 모니터 앞에 서서 차준환의 경기를 관찰했다. 하뉴가 1위로 올라 있지만 차준환은 이틀 전 쇼트 프로그램에서 하뉴를 제치고 4위까지 오른 터. 쇼트와 프리를 합산한 총점으로 최종 순위를 가리는 만큼 차준환의 경기에 신경을 썼다.
차준환이 2위에 오르자 일본 취재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일본 기자는 "일본에서 하뉴의 인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면서 일본 내 분위기를 설명해줬다.
경기 중 1, 2, 3위에 있는 선수는 믹스트존에 나오지 않는다. 메달이 결정될 수 있기에 최종 순위를 기다린다 하뉴는 1위, 차준환은 2위로 경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믹스트존은 기다림의 시간이 됐다.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이 하나둘 지나가고 믹스트존에 취재진은 더 많아졌다. 들어오지 못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취재진까지 생겼다.
옆에서 기다리던 한 프랑스 여성 기자에게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뉴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짧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하뉴가 인기가 많아요 아니면 차준환이 인기가 많아요?"
"하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차준환의 인기가 더 많아요."
지극히 주관적인 답변을 했지만 최선의 답변이었다.
잠시 뒤 일본의 우노 쇼마, 가기야마 유마가 1위, 2위로 오르고 차준환에 4위로 밀려나 믹스트존으로 나왔다. 차준환은 해맑은 미소로 한국 취재진 앞에서 소감을 밝혔다.
차준환에게 대기실에서 하뉴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냐고 물었다. 지난 훈련 때 차준환은 하뉴에 대해 '친한 친구'라고 말하며 각별함을 보였었다.
"경기 끝난 후에 룸에 가서 '수고했다'고 말했어요. 너무 오랜만에 보니까요."
차준환은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서로 안부를 묻고 수고했다는 격려 인사를 나눴다고 설명했다.
얼마 뒤 네이선 첸이 깔끔한 연기로 1위로 올라섰다. 경기를 보던 일본 취재진은 첸의 완벽한 경기에 혀를 내둘렀다. 여기저기서 "스바라시(굉장하다)"라는 말이 들렸다.
일본 선수 3명이 모두 금, 은, 동을 따길 원했었지만 첸의 압도적인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 마침내 4위가 된 하뉴가 믹스트존으로 나왔다.
믹스트존으로 오기 전 방송사 인터뷰를 먼저 진행하는데 하뉴는 여러 방송사의 인터뷰를 하나씩 하면서 다가왔다. 믹스트존에 와서도 유럽·미국 등의 취재진이 모여있는 곳에서 다시 5~10분 정도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긴 시간 끝에 하뉴가 한국·일본·중국 취재진 앞에 섰다. 하뉴는 눈웃음을 짓는 차준환의 인터뷰와는 느낌이 달랐다. 크게 감정을 보이지 않으며 얼굴의 변화도 많지 않았다.
인터뷰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한국 취재진이 차준환과 밝은 분위기로 서로 대화를 하듯 이야기를 나눈 반면 하뉴와 일본 취재진은 마치 어느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보통 믹스트존에서 선수 혼자 취재진 앞에 서는 것과 달리 하뉴는 일본 관계자가 옆에 서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인물을 대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하뉴의 취재가 끝났고, 믹스트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텅 비었다. 취재진이 기사 작성을 위해 썰물처럼 빠져나가 적막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