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가 최근 지상파 미니시리즈 중 전무후무한 흥행을 기록한 결정적 이유는 지루한 관습을 깬 영리한 시도에 있다. 어느 한 쪽에 기울어진 로맨스가 아니라 여성 캐릭터들에 남성 캐릭터들 못지 않게 탄탄한 서사를 부여해 중심축을 잘 잡았다. 여성을 수동적으로 대상화하는 오류도, 폭력적 판타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극뿐만 아니라 모든 로맨스 드라마들이 눈 여겨 볼 지점이다.
굳이 조선시대의 성별 권력 관계까지 따지지 않더라도, '시선의 전복'은 성공을 거뒀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획일적 판타지 로맨스보다 현실에 가까운 캐릭터들의 인간적 고뇌와 그럼에도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절묘한 농도를 맞췄다. '왕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삶'과 맞바꾸는 딜레마라는 것, 궁 안에 있는 여인들의 삶이 '화려한 감옥'이나 다름없는 것, 그렇게 결국 자유로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사랑을 완성한 것.
기존 드라마 문법이 익숙한 시청자들에게는 '옷소매'의 전개가 답답하게 느껴졌으리라 짐작된다. 실제로 말을 최대한 아낀 산(이준호)과 덕임(이세영)의 로맨스에 이런 반응들이 많았다. 산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덕임을 향한 원망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연출을 맡은 정지인 PD는 흔들리지 않고, 처음부터 설정한 최선의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나 자신의 삶'을 내려놔야 하는 사랑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어떤 무게도 더하거나 빼지 않았기에 드라마는 끝내 '캐붕'(캐릭터 붕괴) 없이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은 CBS노컷뉴스와 정지인 PD의 인터뷰 일문일답.
A 방송을 함께 만들어 온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 분들, 그리고 늦은 시간에 끝까지 함께 해주신 시청자 분들에게 감사 드린다. 원작과 대본의 힘을 믿었고 현장에서 배우와 스태프들의 에너지를 믿었기에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을 기대했는데 이 정도까지 반향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이라 좋으면서도 많이 낯설고 얼떨떨하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지 몰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당장 복기할 자신은 없지만 보게 되면 또 부족한 면도 보이고 그럴 것 같다. 다들 반응이 좋은 건 얼마 안 가니 있을 때 즐기라고 하는데 어떻게 즐겨야 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인터뷰도 처음 하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Q 최근 사극 로맨스 드라마가 대세다. '옷소매'의 가장 큰 승부수는 무엇이었을까
A '옷소매'만의 차별점은 실존인물을 등장시켜 새롭게 해석을 더한 원작이 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원작을 바탕으로 시작과 끝을 정해 놓고 원활하게 흐름을 잡아간 덕에 제작 일정에 맞춰 대본 작업을 무리 없이 소화했고 정해리 작가님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촬영 일정에 맞춰 준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항상 시간에 쫓기는 드라마 현장에서 모든 제작진이 한 가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우리의 진심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좋은 원작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산과 덕임의 절절한 감정에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을 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가 이미 '스포'이기 때문에 모두가 아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만, 둘의 마음이 어우러지는 과정을 시청자들이 함께 따라가는 게 느껴졌다. 이는 결국 이준호, 이세영 배우 덕이라고 생각한다. 대사와 지문 이상으로 섬세하게 결을 나눠 산과 덕임을 연기한 두 배우 덕에 기대 이상의 사랑을 받았다고 느낀다.
Q 원작 소설이 있는 드라마였다. 지키려고 했던 소설의 매력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바꾼 부분이 있을까. '완벽한 해피엔딩'을 원하는 시청자들은 결말을 소설과 다르게 갔으면 좋았겠다는 의견도 있더라
A 드라마로 각색할 경우에 소설의 마지막이 너무 비극적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무조건 원작처럼 드라마를 끝내겠다고 했다. 원작의 정서와 마지막 느낌을 살리는 것이 드라마 제작의 목표였다. 반면 원작의 정서를 잘 살리되 원작을 보지 않은 분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작가님과 제 목표였다. 정해리 작가님은 실존인물이 나오는 만큼 영·정조 시대의 서사를 살리고 싶어했고, 이에 따른 전개와 극적인 장치를 고안했다. 저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과 정서적인 방향에 대한 고민을 주로 하면서 작가님께 자유롭게 의견을 드렸다.
A 상상력을 가미해서 인물과 사건, 배경을 만들지만 실존인물들을 다루고 실제로 있었던 시대를 다루는 만큼 기본적인 고증을 최대한 지키고자 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면서 관심이 많은 영·정조 시대라 자유로운 표현보다는 고증에 최대한 충실하자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현대인이기에 개인적으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시청자들에게 이런 부분이 거슬리기 시작하면 드라마의 몰입이 깨질 수 있을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최대한 지켜보자고 생각했다.
Q 이산과 성덕임,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정조와 의빈의 애절한 로맨스로 사극에서 많이 다뤄져 왔다. 때문에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관점과 해석이 필요했을 것 같다. '옷소매' 이산과 성덕임은 어떤 캐릭터로 구상했나
A 산과 덕임의 캐릭터 구축을 어떻게 해야 원작의 정서와 함께 실제와 같은 생생한 느낌을 그리느냐가 주요 고민이었다. 덕임의 경우, 가늘고 길게 살고자 하는 원작의 모습에서 선택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는 성격을 심어주고 싶었다. 성별과 계급에 따른 시대적 한계가 명확하지만 그 한계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선택하는 사람을 그리고자 했다. 산의 경우, 원작에서는 세손과 왕으로 덕임의 입장에서 묘사되었기 때문에 더욱 고민이 많았다. 대상화만 될 경우에는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적합하지 않았기에 원작에서 묘사하는 성격을 최대한 가져오되 수많은 기록들을 보면서 '이산'이라는 사람을 그리고자 했다. 캐스팅이 완료된 후에는 두 배우들에 맞게 대본 수정을 했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을 만났을 때의 일차적인 인상과 작품이나 인터뷰에서 보여준 느낌들을 좀 더 담아내고자 했다.
Q 덕임의 캐릭터가 특히 새로웠다. 역사 속 의빈은 유교적 덕목을 따랐던 사람이었는데 '옷소매' 성덕임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사랑마저 재고하고, 끝까지 노력하는 주체적 캐릭터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까. 말미에 정순왕후가 혜경궁 홍씨와 대화를 나누며 여인들에게 궁은 '화려한 감옥'이라고 묘사한 대사도 인상적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궁궐 로맨스를 다룬 시도가 성공한 것 같다
A 사극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주체성은 명확히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를 어느 선까지 넘을 수 있는 지 매번 시험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미 '대장금'과 같은 선구안적인 작품이 있었기 때문에 궁녀의 역할을 그 작품 이상으로 살리는 것은 분량으로도 무리라고 생각했다. 짧은 호흡의 미니시리즈 안에서 정해리 작가님의 서사 속에 원작에 있는 궁녀들의 마음과 생각이 보는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집중했다. 이는 비단 성덕임과 동료들뿐만 아니라 궁에서 생활하는 다른 여성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그 마음에 따라 덕임은 선택을 한다. 사소한 것이라도 본인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덕임을 그리고자 했다.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선택하는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영씨와는 첫 미팅부터 마지막 촬영까지 덕임의 마음을 물었다. 덕임이 어떤 마음으로 대사를 하고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원작을 바탕으로 해서 대본을 읽어가며 세영씨가 생각하는 덕임의 마음을 나침반으로 삼았다.
A 이 작품 속에서 사랑을 표현하고 고백하는 행위는 권력과 상관이 있다고 해석했다. 산은 세손시절부터 조심스럽게 마음을 표현하다가 권력의 정점에 선 왕이 되면서부터 적극적으로 덕임에게 구애한다. 지존이 된 산은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없고 분명 덕임도 후궁으로서 자신과 함께 하면 행복할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덕임은 다르다. 후궁이 되는 순간, 일상은 송두리째 파괴되며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산을 사랑하지만 왕을 사랑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최소한의 저항으로 침묵을 택한다.
물론 저도 대본을 보면서 작가님께 산이 왕이 된 후에 덕임은 왜 이렇게 말이 없어졌냐고 투덜댔다. 하지만 왕이라는 지위에 짓눌리는 궁녀인 덕임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침묵이 최선의 방법이라 납득했다. 대사와 행동이 제한된 덕임을 보여주는 것은 온전히 세영씨의 몫이 됐다. 왕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궁녀의 마음과 함께 산을 사랑하는 덕임의 마음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세영씨는 처연한 눈빛과 미세한 손짓과 함께 최소한의 대사로 표현해냈다. 이런 감정이 준호씨에게 전달됐기 때문에 더욱 애가 타는 산의 마음을 준호씨가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Q 입체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캐릭터, 각 인물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애절한 로맨스를 그려내는데 성공했다는 호평이 나온다. 보통 극적인 로맨스를 위해 캐릭터는 희생되는 측면이 있기도 한데 꿋꿋하게 캐릭터와 로맨스 사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지점이 있다면
A 제 노력보다는 이준호, 이세영 배우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들이었다. 특히 후반부는 배우들의 캐릭터에 대한 해석과 몰입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가는 기분이었다. 대본으로 볼 때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던 부분도 리허설을 하면서 충분히 납득했다. 현장에서 둘의 연기를 일차적으로 즐기고 편집을 하면서 이차적으로 즐기는 과정이 마지막 방송까지 이어졌다. 온전히 산과 덕임으로 살아가고 있던 준호씨와 세영씨 덕에 끝까지 지치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다.
Q 두 배우와의 호흡이 무척 좋았나 보다. 사실 그동안 이준호와 이세영은 연기력이 검증됐지만 흥행 대표작은 많지 않았다. 아마 '옷소매'가 이들 배우 경력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듯하다. 메인 PD로서 뿌듯하겠다
A 둘 다 쉽게 만족하지 않는 배우들이다. 배려심도 많고 상대방과의 연기 합을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감독의 입장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특히 멜로물에서는 두 배우의 합과 케미가 중요한데, 세영씨와 준호씨는 리허설 중 끊임없이 상의하며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할 지에 대해 상대방과 맞춘다. 물론 그 사이에는 세상 희한한 장난도 섞여 있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웃다가 정신 못 차리는 적도 많았다. 새삼 저렇게 장난 치다가도 슛을 들어가면 산과 덕임이 되어 집중하는 모습에 언제나 감탄했다.
두 배우 모두 성실하고 연기 감각이 훌륭하며 제작진과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다. 이번 작품이 아니었어도 빠른 시일 내로 흥행 대표작이 풍성하게 쌓일 배우라고 생각한다. '옷소매'라는 작품을 두 배우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봐 주신다니 연출로서 황송하고 뿌듯하다. 감사하다. 실제로 그러하다면 이번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영광이었다. 둘 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게 될 지 너무 기대가 되고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Q 원작은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옷소매' 역시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연출자의 관점에서 '옷소매'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이고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전달이 됐다고 생각하는지
A '왕은 궁녀를 사랑했고, 궁녀는 왕을 사랑했을까'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했다. 산은 덕임을 사랑했고, 덕임 역시 산을 사랑했다. 하지만 산이 주는 제왕의 사랑은 덕임이 소중히 여기는 일상을 압도하며 소소한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덕임은 본인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이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충심으로 연심을 가려보기도 하고, 그 연심을 숨기면서까지 산을 밀어낸다. 하지만 왕과 개인의 삶이 이미 동일화된 산은 그런 덕임을 아마 끝까지 이해하기 힘들었을 거다. 그런 둘의 마음과 함께 이 이야기를 따라왔다. 마지막을 향해 가며 덕임의 작고 소중한 마음을 모르는 산이 안타깝고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왕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엔딩에 와서야 산은 처음으로 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그저 한 사내로서 덕임의 곁에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덕임은 처음으로 산에게 먼저 입을 맞춘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영원이 된다. 산과 덕임의 이 모든 순간이 시청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