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의 황당 판정에 대해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를 결정한 대한체육회. 올림픽 판정과 관련해 한국 스포츠가 CAS 제소를 하는 것은 무려 18년 만이다.
베이징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 윤홍근 단장은 8일 중국 베이징의 대회 메인 미디어 센터(MMC)에서 열린 긴급 기자회견에서 전날 쇼트트랙 남자 1000m 판정에 대해 "절차에 맞게 즉각 CAS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다시는 국제 빙상계와 스포츠계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8일 쇼트트랙 남자 1000m 준결승에서 한국 선수들은 난해한 판정 끝에 실격을 당했다. 황대헌(강원도청)은 1조 1위로, 이준서(한체대)는 2조 2위로 골인했지만 레인 변경 반칙을 이유로 페널티를 받았다.
대신 1, 2조 3위였던 중국 선수들이 어부지리로 결승에 진출했다. 특히 1조 3위였던 이원룽은 결승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종목 세계 기록과 올림픽 기록을 보유한 황대헌이 빠진 가운데 중국 런쯔웨이가 결승에서 2위로 들어왔지만 앞서 골인한 샤올린 산도르 리우(헝가리)가 역시 페널티 2개를 받아 실격되는 바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황대헌은 중국 선수들을 추월하는 과정에서 접촉조차 없었다. 중국 여자 쇼트트랙 전설 왕멍조차 "정말 의외"라고 할 정도였다. 한국 선수들의 실격으로 중국 선수 2명이 올라가 메달까지 따낸 점을 감안하면 개최국 특혜라는 의혹이 들 수밖에 없다.
때문에 체육회는 CAS 제소라는 강경 카드를 들고 나왔다. 이와 함께 윤 단장은 "국제빙상경기연맹(ISU)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면서 "IOC 토마스 바흐 위원장과 면담도 요청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CAS에서 체육회가 승소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미 공식 경기 결과가 정해진 데다 ISU가 한국의 판정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실상 실익이 없는 법정 공방이 될 공산이 크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당시 오심 피해를 입은 체조의 양태영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당시 양태영은 기계체조 남자 개인 종합에서 57.774점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평행봉에서 심판이 가산점 0.1을 덜 주는 오심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금메달을 따낸 폴 햄(미국)의 57.823점과 0.049점 차라 순위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 특히 평행봉 주심이 미국인인 데다 기술 심판 중 1명은 햄의 고향에서 지도자와 심판으로 활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더욱 커졌다.
이에 체육회는 CAS 제소를 결정했다. 하지만 CAS는 "승부 조작, 심판 매수가 아닌 심판의 실수에 따른 오심은 번복 대상이 아니다"고 판결했다. 명백한 오심이었지만 메달 색깔은 바꿀 수 없었다. 국제체조연맹이 주심과 기술심에 대해 징계를 내렸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심판 매수나 승부 조작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번복이 불가한 것이다. 더군다나 쇼트트랙은 체조처럼 객관적인 점수 체계가 있는 게 아니라 비디오 판독에서 심판장 1명이 주관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터라 명백히 오심을 잡아내기도 쉽지 않다.
때문에 양태영 이후에도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이 억울한 판정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CAS 제소까지는 가지 않았던 것이다. 2012 런던올림픽 당시 펜싱 여자 에페 4강전에서 신아람이 이른바 '1초 오심'의 희생양이 됐지만 체육회는 "판정에 부정이 개입했거나 의도적인 잘못이 아니면 심사 대상이 아니다"는 국제 변호사의 조언에 CAS 제소를 포기했다.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피겨 여왕' 김연아가 완벽한 연기를 펼쳤음에도 개최국 러시아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에 금메달을 내주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트니코바는 프리 스케이팅에서 한번 점프 실수가 나왔음에도 김연아보다 5점 이상 앞섰다. 체육회는 ISU에 판정과 관련해 제소했지만 기각됐고, CAS 제소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체육회가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판정에 대한 CAS 제소를 선택한 것은 남은 경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6개의 금메달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만큼 한국 선수들이 향후 판정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강경한 자세로 ISU와 개최국 중국에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다.
이날 회견에 윤 단장과 동석한 ISU 쇼트트랙 국제 심판 최용구 대표팀 지원단장이 "ISU가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예상했다"면서 "남은 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이 또 부당한 일을 당할까 봐 항의한 것이고 더 강력히 제소하겠다"고 강조한 이유다. CAS 제소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최 단장은 "오심은 한번으로 족한데 그 이상이면 고의적"이라고도 했다. 더 이상 중국에 유리한 편파 판정이 나온다면 의도가 명백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당장 9일 남자 1500m와 여자 1000m, 계주 3000m 경기가 열린다. 과연 한국이 보낸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에도 중국에 대한 무지막지한 편파 판정이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