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엄동설한' 속 세입자들 비춘 한줄기 '햇살'

성남 산성동 재개발 진행…엄동설한 세입자 강제퇴거
도와달라 말하면 "법대로 하는 것", "억지 말라"
현실은 법의 그늘에…갈 곳 없어 아들 친구 집 전전
'재개발 강제퇴거' 보도 후 메일 "부모님 살던 집 비었으니 사용하시라"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세입자는 미소지었다

'기사 보고 메일 보냅니다'

이른 오전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성남시 재개발이 시작되며 세입자들이 갈 곳을 잃었다는 기사를 봤다고 한다.

재개발을 진행하는 조합 측일까, 아니면 떠밀려 나간 또다른 세입자일까. 정작 메일을 보낸 사람은 어느쪽도 아니었다.

'성남 재개발로 세입자들이 이주할 곳이 없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저희 시골이 경북 안동인데 거실과 방 3개가 있는 집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현재 빈집인데, 갈 곳이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내라고 하세요'.

이재한 씨가 보낸 메일.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쓴 메일. 보낸이는 이재한(55)씨다. 우연히 기사를 보고 세입자의 사정이 안타까워 연락했다고 한다. 그는 직접 찍은 안동 자택 사진까지 보냈다.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이씨는 덤덤한 목소리로 "기사를 봤는데 쪽방에 계신 할아버지가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안타까웠다"며 "작년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빈집으로 남아 있는데, 산책로도 가깝고 마을 사람들도 있으니 지내기 괜찮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전기요금도 자동이체로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며 "이렇게 인터뷰를 할 만한 일은 아니고, 집이 비어있는 것보단 사람이 있는 게 좋아서 그런 것"이라며 겸연쩍어했다.

성남 산성동에서 강제퇴거 된 세입자가 자신의 사무실에 간이침대를 놓고 생활하고 있다. 정성욱 기자

이씨가 걱정하는 것처럼 현재 산성동 세입자들은 벼랑 끝에 서있다. 남아있는 세입자는 30여 세대.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자다. 전 재산은 반지하 방 보증금 500만원. 인근 부동산에선 5천만원짜리 반전세만 안내한다. 이미 떠밀려 나간 한 세입자는 자신의 사무실에 간이 침대를 놓고 생활하고 있다. 온수가 끊겨 난로로 물을 데운다.

세입자들은 "나갈 때 나가더라도 겨울만 나게 해달라. 지금은 너무 춥다"고 말한다.


치트키 "법대로"만 입력하면 끝일까


말할 때마다 왠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말이 있다. "법대로 해." 이 '치트키(cheat key)' 앞에선 웬만한 주장은 궤변이 된다. 법을 지키지 않고 감정에만 호소하는 사람, 떼를 쓰는 사람이 된다.

조합 측은 세입자들에게 이미 1년간 이주 기간을 줬다고 한다. 매달 은행 이자만 수억원씩 나가는데, 세입자들이 나가지 않아 공사를 시작하지 못한다고 하소연한다.

성남시는 민간 개발인데다 '동계 철거'를 금지하는 조례도 없어서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한다. 모두 법대로 하고 있다.

성남시 산성동에서 법원 집행관들과 용역업체가 강제집행을 하고 있다. 정성욱 기자

하지만 현실은 법의 그늘에 있다. 산성동 세입자와 같은 철거민은 늘 빈곤 속에 있었다. 1970년대 초 서울의 판자촌이 강제철거 되면서 지금의 성남시로 철거민이 넘어왔다. 장소만 바뀌었을뿐 가난은 계속됐다. 여건만 된다면 진작 다른 동네로 넘어갔겠지만, 갈 돈이 없다. 산성동에서 만난 세입자들은 계속해서 성남 인근을 전전했다고 한다.


법대로 하고 있는데 왠지 현실은 처참했다. 산성동에 살던 한 세입자는 용역업체가 자신의 생필품을 내던지는 모습을 보고 담벼락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또다른 세입자는 갈 곳이 없어서 자식의 친구집까지 전전하고 있다고 한다. 신세지는 입장이어서 스스로 '통금시간'도 정했다고. 과거처럼 폭력으로 얼룩진 강제철거는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힘없고 돈없는 세입자들은 피를 흘리고 있다. 벼랑 끝에서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법조항만 들이대는 걸 준법사회라며 박수쳐줘야 할까.

용역업체의 강제철거가 진행된 성남 산성동 한 마트 모습. 정성욱 기자

특히 성남시는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지켜보고만 있다. 그런데 성남시에는 없다는 법이 다른 지자체에는 있다. 서울시나 부산시, 광주시, 대구시 등은 '12월부터 2월까지' 세입자들에 대한 강제 퇴거를 제한하고 있다. '시민이 행복한 성남'이라는 말이 낯뜨겁다.


"갈 수는 없겠지만…감사합니다"…그래도 세입자는 웃었다


냉혹한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이씨와 통화하는 내내 마음이 들떴다. 나중에는 목소리가 다소 커진 것 같아 입을 반쯤 가리고 통화했다. 주위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때, 오히려 돌아가신 부모님 집을 내주겠다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말이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이 현실에 있긴 있었다.

세입자들에게 이씨의 소식을 전했다. 세입자들은 "참 고마운 분이다. 너무 감사하다"며 "다만, 당장 먼 곳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고 답했다.

쓴웃음이 들렸던 것도 같다. 그래도 웃음소리가 더 컸다고 믿는다.

[관련기사: CBS 노컷뉴스 2022년 1월 21일자 '[르포]"이 추위에 어디로"…성남 재개발 벼랑끝 세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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