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노동운동 역사의 상징 전태일(1948~1970). 그러나 평화시장에는 노동자를 위해 스스로 불꽃이 되었던 전태일 열사 말고도 많은 노동자, 특히 수많은 어린 여성 노동자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젊은 날을 불태웠다.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발굴해 어루만지는 작품이다.
그 시절 평화시장에는 가난해서 혹은 여자라서 공부 대신 미싱을 타며 '시다' 또는 '공순이'로 불린 소녀들이 있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시다' '공순이'가 아닌 '여성 노동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편견 속에 감춰진 그 시절 소녀들의 청춘과 성장을 다시 그린다.
노동운동의 역사나 굵직한 사건이 주로 남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이야기돼 온 상황에서, '미싱타는 여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특히 그동안 1970년대라는 시간 안에서 잊힌 채 이름도 없이 '여공' '시다' '00번' 등으로 불렸던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발굴하고, 개개인에게 이름을 찾아줬다는 점에서도 이 영화가 갖는 의미는 크다.
그런 여성 노동자들에게 한 명의 존재로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게 바로 노동교실이다. 중등 교육 과정을 무료로 가르쳐주는 '노동교실'은 노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재와 권리를 알아가고 키워갈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노동교실을 빼앗고자 하는 국가 권력에 맞서,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지키고 획득하기 위해 어린 노동자들은 온몸으로 부딪히며 매일같이 투쟁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이러한 어린 여성 노동자, 청계피복노조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단순히 기록하거나 노동운동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보다 제대로 불리지 못했던, 잊혔던 이름들을 불러주고 그들의 당시 투쟁이 의미 있었노라고, 고생했다고 토닥이는 데 중점을 둔다.
이러한 사려 깊은 시선은 영화 오프닝에서부터 드러난다. 열기와 먼지로 가득 찬 회색빛 공간에서 햇빛조차 보지 못한 채 숨과 색을 잃었던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감독은 탁 트인 공간으로 나가 그들의 과거에 숨 쉴 수 있는 공기와 따뜻한 햇볕 아래 미싱을 타게 한다. 마치 과거를 보상받듯이 말이다.
오프닝 외에도 그들을 기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당시 어린 노동자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과정들을 넣었다. 빛을 잃었던 소녀들에게 밝고 화사한 색을 입힌 초상을 선물하고, 연대로 이겨냈던 1970년을 위로하기 위해 당시 노래들을 합창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투쟁의 역사, 노동의 역사, 운동의 역사 등에서 여성들이 분명 존재했음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노동운동 역사의 그림자로만 존재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는 것 자체로도 이 영화는 '시다' '여공'으로 불렸던 그들을 인정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동시에 영화와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연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이며 자신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라는 것을 다시금 증명한다. 함께했기에 함께하는 삶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노동자들 이야기에는 그들의 삶, 그들을 움직인 원동력, 그리고 1970년대 노동 운동의 역사가 모두 담겼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눈빛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자신의 길을 치열하게 살아 온 이들만이 보일 수 있는 반짝임이다. 그들의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크나큰 위안과 용기가 된다.
109분 상영, 1월 20일 개봉, 전체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