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국가방위력 강화'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과거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던 남북관계와 대외 정세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논의가 되지 않았을 리 없지만 여러 이유를 감안해 의도적으로 이를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5문장 정도뿐인 국방 분야 언급…대남·대미 언급은 어물쩡 넘어가
보도는 먼저 "국방공업부문에서 자기의 정확한 발전계획에 따라 첨단무기체계들을 연속 개발해 내면서 우리 군사력의 선진성과 현대성을 크게 과시한 것은 올해 성과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한 해 지대지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과 장거리 순항미사일, 극초음속 미사일이라고 주장하는 화성-8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을 연달아 시험발사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서 "날로 불안정해지고있는 조선반도(한반도)의 군사적 환경과 국제정세의 흐름은 국가방위력 강화를 잠시도 늦춤 없이 더욱 힘 있게 추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군을 '당중앙의 혁명사상으로 일색화'하고, "당중앙의 영도에 절대충성, 절대복종하는 혁명적당군으로 강화하기 위한 사업을 끊임없이 심화시켜나가야 한다"고 언급했다.
군수공업 부문을 언급하면서는 "당 제8차 대회(8차 노동당 대회) 결정을 높이 받들고 이룩된 성과들을 계속 확대하면서 현대전에 상응한 위력한 전투기술기재 개발생산을 힘있게 다그치며 국가방위력의 질적변화를 강력히 추동하고 국방공업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목표를 계획적으로 달성해 나가야 한다"며 "현대전의 요구에 맞게 민방위 무력을 강화하기 위한 결정적인 대책을 세우며 훈련혁명을 일으켜 노농적위군 지휘성원들의 군사적 자질과 지휘능력, 민간 무력의 실전 능력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 보도에서 국방 분야를 언급한 부분은 사실상 위 내용이 전부다. 지난해 초 8차 노동당 대회에서 무기 종류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성과를 과시하고 앞으로 어떤 무기체계를 개발할지 매우 상세히 늘어놓은 점을 생각해 보면, 이번엔 내용이 비교적 두루뭉술한데다 비중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통일연구원 홍민 연구위원은 "국방공업, 첨단무기체계 개발, 국가방위력 강화를 확인한 것은 기존 8차 당 대회부터 제시했던 전략적 기조를 유지하는 데 변함이 없다는 의미"라며 "첨단무기체계 개발이나 국가방위력 부분을 짧게 언급한 것은 정세 관리 차원에서 대미, 대남 자극을 최소화하겠다는 태도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사실 북한은 외부의 위협 때문에 '자위적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국제사회가 이를 문제삼는 일을 '이중기준(double standard)'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북한은 자신들이 대외관계를 현재 어떻게 평가하고 있다는 내용을 언급하는 일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날 보도에서 대남·대미관계를 언급한 부분은 "다사다변한 국제정치정세와 주변환경에 대처하여 북남(남북)관계와 대외사업 부문에서 견지하여야 할 원칙적 문제들과 일련의 전술적 방향들을 제시하였다"는 한 문장뿐이다.
공개 안 한 이유는?…전문가들 "이미 김정은 연설서 방향 제시, 정세 관리 차원"
북한대학원대 양무진 교수는 "토론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토론 내용을 비공개 처리했다"며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전달하려는 내용에 변화가 없거나, 내용의 공개에 대해 수위 조절을 하는 측면이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첫 번째 측면에서 보면 원칙적인 문제는 이미 지난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시정연설과 국방전람회 연설에서 나와 있으며, 두 번째 관점에서 보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지를 남기며 수위조절을 하고 있다"며 "강온전략을 기본으로 하되 베이징 동계올림픽, 한미연합훈련 문제, 남한 대선, 미중관계 추이 등을 감안하며 대응방향 등을 정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다시 말해 이미 지난해 당 대회와 김정은 위원장 연설에서 국방력 강화 방향과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이를 또 되풀이할 필요가 없으며, 한편으로는 한반도 정세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일정들을 앞두고 있는 만큼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일부러 공개를 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는 얘기다.
홍민 연구위원도 "2021년도 대남·대미 정책 평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데 따른 정치적 부담감과 2022년도 1/4분기 주요 정세 변수들 그리고 조성될 정세를 고려하여 정책 기조를 밝히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 신중하게 결과를 보고 대응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홍 위원은 그 근거로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3월 9일로 예정된 남한 대선, 미국이 1~3월 발표하는 4대 전략보고서(핵태세검토보고서(NPR), 국가안보전략서(NSS), 4년 주기 국방검토보고서(QDR), 국방전략서(NDS)) 발표, 미중 전략경쟁 구도를 들며 "비판적 평가나 구체적 전술을 공개하기보다는 신중하게 정세를 관리하는 쪽으로 내용을 비공개했다"고 말했다.
미국 4대 전략보고서에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언급되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다. 전원회의를 통해 부정적인 평가나 강경한 기조를 피력했다가 보고서에 영향을 주는 일을 막기 위해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메시지는 자제해 중국을 배려하며, 전반적으로 미중 갈등 구도가 심화되고 있는 만큼 정세 불확실성에 대처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향후 전략적 태도를 가시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며 "대남, 대미 관련 부분을 비공개한 일은 한국과 미국에게는 긍정적 메시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종전선언에 대해 구체적인 입장을 유보하는 모양새를 보임으로써 한미가 얼마나 적극성을 보이는지 지켜보면서 대응하겠다는 취지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