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한국 배구는 그 어느 종목보다 격변의 시간을 보냈다. 엄청난 영광을 누렸지만 또 그에 못지 않은 뼈아픈 시련을 겪었다. 야구와 축구에 버금가는 인기 종목으로 거듭났지만 급격한 인기 상승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도 발생했다.
특히 여자 배구는 도쿄올림픽에서 전국민적인 관심을 얻었으나 지탄을 받을 사건도 잇따랐다. '배구 여제' 김연경(31·중국 상하이)이라는 세계적인 스타와 학교 폭력, 하극상이라는 빛과 그늘이 함께 했다. 상대적으로 관심도에서 살짝 밀렸던 남자 배구도 창단 첫 통합 우승을 일군 명문 대한항공 에이스 정지석(26)의 스캔들로 아쉬움을 남겼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해 한국 배구를 돌아본다.
▲쌍둥이 자매, 얼짱 뒤에 숨겨졌던 폭력의 그늘
올해 한국 배구를 논할 때 '쌍둥이 자매'를 빼놓을 수 없다. 이재영, 이다영(이상 25·PAOK 테살로니키)은 한때 한국 배구의 아이콘으로 통했지만 이른바 학교 폭력 논란으로 얼룩졌다. 사실상 한국 배구에서 영원히 사라질 이름으로 바뀌었다.
2020-2021시즌 V리그를 앞두고 쌍둥이 동생인 이다영은 흥국생명과 계약하면서 언니 이재영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여기에 해외 무대에서 세계 최고 선수로 군림했던 김연경이 친정팀 흥국생명에 복귀하면서 역대급 라인업이 탄생했다. 국가대표 에이스 김연경과 레프트 이재영, 세터 이다영이 한 팀에서 뛰는 초호화 멤버다.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어우흥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스타들이 밀집한 흥국생명에는 불화설이 감돌았다. 이다영이 선배 김연경을 저격하는 듯한 메시지를 SNS에 올렸지만 이게 재앙의 씨앗이 됐다. 이재영까지 쌍둥이 자매의 예전 학교 폭력을 폭로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오면서 여론의 엄청난 역풍을 맞았다. 이다영이 흉기로 동료를 위협하며 폭력을 가했다는 구체적인 경험담까지 올라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쌍둥이 자매는 지난 2월 소속팀 흥국생명으로부터 무기한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어우흥이라던 흥국생명은 김연경이 고군분투했지만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재영, 이다영은 시즌 뒤 흥국생명에서 아웃되면서 해외 무대 진출을 타진했다. 대한배구협회는 명예 실추를 이유로 이들의 국제이적동의서 발급을 거부했지만 쌍둥이 자매는 국제배구연맹(FIVB)를 통해 기어이 그리스 리그로 진출했다. 사실상 한국 배구와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김연경과 한국 여자 배구, 도쿄를 수놓다
쌍둥이 자매가 오점을 남긴 한국 배구는 그러나 뜨거웠던 도쿄올림픽의 영광을 맛봤다. 김연경과 여자 대표팀이 한국 스포츠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연출하며 한반도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주장 김연경과 스테파노 라바리니 대표팀 감독이 이끈 여자 대표팀은 당초 도쿄올림픽에서 8강 진출조차 힘들어보였다. 주전 레프트와 세터인 이재영, 이다영이 학폭 논란으로 제외된 탓이 컸다.
하지만 대표팀은 기적을 만들었다. 조별 리그에서 도미니카공화국은 물론 숙적 일본을 잇따라 풀 세트 접전 끝에 꺾으면서 8강에 진출했다. 특히 일본과 숙명의 라이벌 대결에서는 5세트 12 대 14로 뒤진 가운데서 극적인 대역전승을 거두면서 도쿄올림픽 최고의 하이라이트를 만들었다. 김연경이 양 팀 최다 30점을 쏟아부었고, 박정아(한국도로공사)도 위닝 스파이크로 거들며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자 대표팀은 난적 터키와 8강전에서도 역시 3 대 2 역전 드라마를 써내며 2012년 런던올림픽 이후 9년 만에 4강 신화를 썼다. 비록 세계 최강 브라질과 4강전, 세르비아와 동메달 결정전에서 지면서 메달은 무산됐지만 한국 여자 배구는 투혼을 펼치며 도쿄올림픽에서 국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김연경은 월드 스타의 존재감을 뽐내며 도쿄올림픽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섰다. 박정아와 김희진, 김수지(이상 IBK기업은행) 등 대표팀 주축 선수들도 올림픽 이후 예능 프로그램을 누비며 달라진 위상을 확인했다. 한국 여자 배구는 도쿄올림픽 선전으로 쌍둥이 자매의 공백과 오점을 온전히 잊을 수 있었다.
▲김연경이라고 착각했나? 역린을 건드린 하극상
하지만 도쿄올림픽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김연경과 여자 대표팀이 이뤄낸 업적에 취했던 것일까. 여자 배구 기업은행은 무단 이탈 등 이른바 '하극상' 논란에 휩싸이며 감독 및 단장 경질과 코치 사퇴, 주장 계약 해지 등 한국 배구 인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지난달 주전 세터 조송화(28)가 두 번이나 팀을 이탈하면서 사태의 단초를 제공했다. 김사니 전 코치까지 이탈하는 등 논란이 커지자 기업은행은 서남원 전 감독과 단장을 경질하며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김 전 코치를 감독 대행에 앉히고 조송화가 복귀 의사를 보이면서 오히려 거센 비난 여론에 직면했다. 서 전 감독에 대한 항명 사태를 일으킨 두 장본인에 대한 거부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결국 김 전 코치가 다른 6개 여자팀 감독들의 경기 전 악수 거부 등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사퇴했다. 기업은행은 조송화에 대해 계약 해지 절차를 밟았고, 선수는 이에 불복해 법정 공방을 벌일 태세다. 조송화는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 의사를 밝혔지만 다른 팀들의 부름을 받지 못해 올 시즌 출전이 불발될 전망이다.
찬란한 영광과 추악한 그늘이 함께 했던 여자 배구에 비해 한국 남자 배구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대한항공이 지난 시즌 통합 우승을 이뤘지만 최고의 라이벌로 꼽히던 현대캐피탈과 삼성화재가 부진하면서 관심도 식었다. 여기에 대한항공 에이스이자 MVP 정지석이 사생활 논란 속에 징계까지 받았다. 다만 전력 평준화 속에 펼쳐지는 치열한 순위 싸움이 반등 요소로 꼽힌다.
2021년 다사다난하게 마무리한 한국 배구는 내년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국제 경쟁력을 확인해야 현재의 인기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김연경과 김수지, 양효진(현대건설) 등이 태극 마크를 반납한 여자 대표팀과 올림픽에 출전도 하지 못한 남자 대표팀이 아시안게임에서 기대에 부응할 성적을 낼지 미지수다. 과연 한국 배구의 2022년은 어떻게 전개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