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때도 멀쩡했던 팔꿈치, 독수리 타법에 나갔죠"

여자 테니스 명문 NH농협은행 코치와 감독 등 25년의 삶을 마무리하는 박용국 스포츠단 단장. 테니스코리아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 하나은행 코리아오픈 결승이 열린 지난 26일 서울 올림픽공원 실내코트. 이날 복식 결승에서는 한국 테니스 역사에 남을 의미 있는 기록이 달성됐다. 이 대회에서 2회 우승을 이룬 선수들이 탄생한 것.

한나래(29·인천시청)와 최지희(26·NH농협은행)가 2018년에 이어 이번에도 정상에 올랐다. 남녀 통틀어 한국 유일의 테니스 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이 두 번이나 우승하며 개최국의 자존심을 세웠다.

이들의 우승을 남다르게 지켜본 이가 있었다. 바로 NH농협은행 스포츠단 박용국 단장(56)이다. 박 단장은 대회 해설위원을 맡았는데 제자의 우승 경기까지 중계했다. 공교롭게도 최지희를 스카우트한 2018년 코리아오픈에서 우승한 데 이어 3년 만에 다시 정상에 오른 것.

특히 박 단장은 올해를 끝으로 정년 퇴직을 하는 터라 더욱 뜻깊은 우승이었다. 최지희는 경기 후 "단장님이 감독으로 계실 당시부터 스카우트에 공을 들이셨고, 강원도청과 계약이 끝나 2018년 이적했다"면서 "단장님께 은퇴 선물을 드릴 수 있게 됐다"고 미소를 지었다. 박 단장도 "25년 NH농협은행 생활을 마무리하는데 지희가 값진 선물을 해줬다"고 화답했다.

최지희의 우승은 사실 박 단장이 쌓아놓은 토대 위에서 거둔 결실이라고 할 만하다. NH농협은행은 소프트테니스(정구)와 테니스 등 한국 여자 라켓 스포츠 명문이지만 선수들에 대한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데는 박 단장이 주도한 스포츠단 창단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WTA 투어 하나은행 코리아오픈 복식 정상에 오른 최지희(왼쪽)과 박용국 단장. 코리아오픈 조직위원회

NH농협은행은 1950년부터 소프트테니스, 1974년부터 테니스 선수단을 창단해 운영했다. 여자 라켓 스포츠의 최고 명문으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코트 및 선수단 숙소 등 시설 면에서는 살짝 아쉬움이 있었다. 1997년 1월 NH농협은행 테니스팀 코치로 부임한 박 단장은 "당시 클레이 코트에서 새벽부터 타이어를 마련해 선수들과 동계 훈련을 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가운데 박 단장은 코치와 감독을 지내면서 끊임없이 시설 개선을 요청해 이뤄냈다. 시대 흐름에 맞춰 하드 코트 변경과 선수단 숙소도 마련됐다. 대통령기 단체전 14연패 및 22회 우승 등 엄청난 성적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시 선수였던 최영자 현 수원시청 감독의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여자 복식 우승도 이끈 성공한 지도자였기에 본사에도 당당하게 요구 사항을 전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박 단장은 2017년 7월 스포츠단을 창단해 본격적인 스포츠 행정가의 길로 들어섰다. 박 단장은 "지도자로서 선수단 복지를 위해 아쉬웠던 부분을 직접 해결하고 싶었다"면서 "또 좋은 스포츠 콘텐츠가 있는데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상황을 개선하고 깊은 마음도 컸다"고 돌아봤다.

선수들의 해외 대회 출전과 성적에 대한 포상금 등 전폭적인 지원 체계가 갖춰졌다. 최지희는 "국제 대회 출전 비용을 전액 지원하는 조건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며 NH농협은행 입단 배경을 설명했다. 선수는 물론 감독, 코치까지 입상에 따른 포상금을 받으면서 확실한 동기 부여가 됐다. 결국 최지희가 한국 선수 최초로 코리아오픈 2회 우승을 이룬 데는 이런 당근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비단 라켓 스포츠에만 그치지 않았다. NH농협은행 스포츠단은 테니스 및 정구 생활 체육 대회 개최와 재능 기부는 물론 농구와 골프, 프로 게임 등까지 영역을 넓혔다. 2019년 6월 광화문에서 개최한 3 대 3 동호인 농구 대회, e스포츠 대회 개최, 프로 골퍼 문경준 후원 등으로 NH농협은행에 젊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더했다.

특히 프로당구(PBA)에도 뛰어들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 남녀 아마추어 최강 조재호, 김민아와 베트남 신성 응우옌 후인 프엉 린을 앞세운 NH농협카드는 올 시즌 팀 리그 전반기 준우승을 차지했다. 조재호와 응우옌은 개인 투어에서도 준우승을 거두며 강자로 거듭났다. 박 단장은 "당구단 창단 당시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장한섭 부단장과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녔는데 이제 결실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2019년 제1회 NH농협은행 3X3 농구대회 모습. NH농협은행

발로 뛰는 박 단장 이하 NH농협은행 스포츠단은 4대 은행에 뒤지지 않는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 골프 등 프로 스포츠에 수백억 원을 투자하는 KB국민은행, 우리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등에 비해 NH농협은행 스포츠단의 예산은 수십억 원에 불과하지만 사회공헌활동의 효과는 이에 못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박 단장은 2018년 금융위원회 위원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다소 무겁고 오래된 NH농협은행의 이미지를 스포츠단의 플랫폼을 통해 젊고 세련된 이미지로 바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NH농협은행이 전통을 외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년부터 민속 스포츠인 씨름도 후원하는 등 묵직한 책임도 짊어질 태세다. 권준학 NH농협은행장은 최근 씨름, 테니스, 당구, 정구, 골프 등 유망주들에 대한 후원 협약식에서 "씨름을 공식 후원하는 것은 농협이 지역 밀착, 신토불이, 전통이 떠오르는 이미지라서 종목과 잘 맞고 씨름이 유네스코에 남북한 무형 문화재로 등재된 것도 배경이 됐다"고 강조했다. 박 단장은 "권 행장님이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출신이라 스포츠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쓰신다"고 귀띔했다.

사실 박 단장은 선수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남들보다 늦게 중학교 1학년 때 테니스에 입문해 명문 건국대와 대우중공업 선수로 뛰긴 했지만 태극 마크는 달지 못했고 허리 부상 등으로 일찍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오기로 지도자와 행정가로 성공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됐다. 엄동설한 새벽부터 선수들과 훈련하면서 성적을 냈고, 스포츠단에서는 서툰 컴퓨터 실력에도 며칠을 씨름하며 문서를 작성했다. 박 단장은 "테니스 선수를 할 때도 겪지 않았던 엘보(팔꿈치 부상)가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면서 오더라"고 회상했다.

그런 열정이 성공한 지도자와 행정가 박용국을 만든 것이다. 지난 1월 대한테니스협회장 선거 당시 박 단장은 주원홍 전 회장의 사람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당선된 정희균 현 회장은 박 단장을 협회 주요 인사로 영입하려고 했다. 그만큼 박 단장의 행정력을 높이 샀다는 뜻이다.

WTA 투어 하나은행 코리아오픈 중계 해설을 하는 박용국 단장. 코리아오픈 조직위

이제 박 단장은 올해로 25년 NH농협은행 생활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40년을 이어온 테니스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 운영과 해설위원의 삶은 계속된다.

박 단장은 "농협을 떠나지만 전임 행장님들 때부터 심혈을 기울였던 젊고 역동적인 스포츠 마케팅 시스템은 이어져야 한다"면서 "이제는 테니스 유망주들을 발굴, 육성하기 위해 재능 기부를 하는 등 테니스 및 한국 스포츠의 발전을 위해 제 2의 인생을 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단장은 짧은 휴식 뒤 내년 1월 메이저 대회인 호주오픈 중계 해설을 맡아 팬들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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