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전부터 역사왜곡 논란이 불거졌던 '설강화'는 2회 만에 운동권 학생으로 오인되는 간첩 남자 주인공, 진짜 간첩을 쫓는 사연있는 안기부 설정 등으로 민주화운동을 왜곡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폐지론이 급격하게 확산됐지만 JTBC는 지난 21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간첩이 존재하지 않는다. 향후 오해가 풀릴 것"이라며 정상 방영을 예고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설강화'에 대해 "실제 민주화운동에 간첩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 않냐"는 식의 주장을 내놨다. 따라서 해당 설정이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논리는 기정사실처럼 보수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와 포털사이트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인문학 저서로 유명한 이지성 작가 역시 "'설강화' 핍박자들아, 민주화 인사라 불리는 자들이 학생 운동권 시절 북괴 간첩들에게 교육 받았던 것은 역사적 팩트"라고 주장했다.
보수 언론들도 가세했다. 이미 올해 3, 4월 '설강화' 논란 당시 '주사파(주체사상파) 중 간첩과 연계된 학생들이 있었으며 안기부 요원들의 대공투쟁 덕분에 한국 경제가 성장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됐다. 이번에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등이 악하게 그려진 사례와 비교하면서 '간첩이 운동권 행세를 한 설정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논평도 나왔다.
정말 이런 주장들은 신빙성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까. '침소봉대'격의 일반화라면 수많은 희생 끝에 제도적 민주화를 이뤄낸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이자 폄훼에 불과하다.
역사학자 심용환은 1980년대 주류가 된 학생운동이 급진화됐던 이유를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채감과 전두환 정권 등장에 따른 민주화의 좌절에 있다고 짚었다. 이 과정에서 간첩이 학생들을 의식화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것이다.
그는 "1980년대부터 대학생들이 민주화운동의 주류가 됐다. 일단 대학 수가 늘어났고, 가장 큰 이유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 참혹했던 광주 실태가 대학가에 비디오로 보급되면서 죄책감이 확산됐다. 원래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나려 했는데 광주에만 그런 참상이 일어났으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현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고, 마르크스·레닌 서적들이 들어와 이를 공부하는 문화가 생겼다. 또 미국이 군부 정권인 전두환 정권을 승인해주면서 실망감이 겹쳐 반미자주개념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간첩의 지도가 아니라 엘리트 대학생들 스스로 의식화 한 부분이고 '주사파'는 소수였다. 인과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이들은 우리나라 민주화가 좌절되면서 반동감 때문에 대안을 찾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부작용"이라고 밝혔다.
운동권 학생들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대학 학생들과 토론을 하는 등 사건도 있었지만, 이 역시 평화자주통일 바람에 따른 행보에 가까웠다. 서적으로만 북한을 들여다봤던 학생들 대다수는 실제 180도 다른 모습에 실망감을 안고 돌아왔다.
심용환은 "당시 싸우지 말고 합의해서 냉전문제를 해결하자는 중립화통일론이 떴다. 학생들의 북한행 역시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막상 북한에 가보고 나니 생각했던 그런 체제가 아니고 실망스러워서 입장을 전향하는 일들이 많았다. 온건한 노선으로 바뀌거나 극우인사가 된 분들도 있다. 만약 정말 간첩 세력이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전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북한군 개입 음모론이 꾸준히 제기돼 왜곡처벌법이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한 번 '설강화'로 인해 1980년대 민주화운동 전체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발생했다. 50년도 되지 않은 역사적 배경을 작품에 쓰려면 그만한 존중과 배려, 그리고 고증이 필요한 이유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최진봉 교수는 "현대사를 배경으로 가져오려면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드라마가 돼야 한다. 음모론에 가까운 여지를 주면 왜곡될 수 있고, 이로 인해 불필요한 논란이 생긴다. 아무리 가상이라 해도 실제 기관 이름까지 똑같이 쓴다면 허구세계라고 생각하지 않고 충분히 역사의 한 부분으로 오해할 수 있다. 역사적 고증을 배제하고 다른 의제를 만들어 내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심용환 역시 "창작자의 자유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설강화' 같은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사망한 전두환씨를 비롯해 당시 가해자들 중에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한 사람이 없다. 시대 상황이나 국민감정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배려를 검토하면서 신중하게 갔어야 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