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경영상 어려움이 우려된다는 막연한 이유만으로는 법에 정한 임금을 가로챌 수 없고, '회복가능성' 등 미래의 경영상황까지 살펴보도록 제한한 결과다.
대법원은 16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A씨 등 10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소송의 상고심에서 사측의 손을 들어줬던 원심을 파기하고 원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원고인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다시 산정한 법정수당·퇴직금 등과 실제로 받았던 과거 지급분의 차액을 2012년 회사에 청구했다.
앞서 2심에서는 "신의성실의 원칙(이하 신의칙)에 위배된다"며 사측의 손을 들어줬지만, 대법원은 "회사가 경영상태의 악화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고 향후 그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다며 신의칙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신의칙'은 권리 행사, 의무 이행을 신의에 따라 성실히 해야 한다는 민법 원리다.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흔히 '임금을 지급하면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사용됐다.
이에 대해 2013년 12월 대법원에서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의 임금 청구 소송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회사 존립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추가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하면서 '신의칙' 원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기준 약 150개 회사들이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신의칙'이 적용되면 회사가 패소하더라도 정작 임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현행 법보다도 우선하는 임금 소송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됐다.
문제는 정작 신의칙을 적용할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소송 기간이 길어지고 노사 대립이 격해질 뿐 아니라, 비슷한 통상임금 소송에도 서로 다른 판결이 내려졌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한국GM이나 쌍용자동차, 아시아나항공 소송에서는 신의칙을 적용해 기업의 손을 들어줬지만, 이어 기아자동차, 금호타이어의 통상임금 소송에는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고 밀린 임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대법원 판결은 최근 조선업계가 전세계적인 물동량이 증가하고, 환경 규제로 수주량이 늘면서 회복세를 보인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동안 단순히 경영실적 지표 따위를 토대로, 일시적인 경영악화나 향후 악화될 가능성 등 애매한 기준으로 신의칙 여부를 나눴다면 이번 판결에서는 기업의 수익성과 그 변동 추이, 산업 동향 등은 물론 향후 경영상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까지 고려하도록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따라서 앞으로는 단순히 회사가 적자 상태라는 이유 만으로 노동자가 받아야 할 임금을 가로챌 수 없고,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야 비로소 신의칙 여부를 따져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금속노조법률원 송영섭 변호사는 "신의칙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은 이전에도 대법원이 입장을 명확히 표명해왔다"며 "애초 법을 위반한, 위법한 관행을 대법원이 직접 신의칙으로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근로기준법의 강행 규정성을 신의칙으로 번복하는 것이 맞느냐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이번에 사실상 강행 규정을 번복하는 신의칙 적용은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며 "하급심에서도 최근 2년여 동안 단순히 청구 금액이 크고 경영 이익 규모가 작아 위험할 수 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경영의 위험이 구체화됐느냐 여부를 엄격하게 보고 있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