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이 전작 '로우'에 이어 또 한 번 독창적인 상상력, 자신만의 색으로 무장한 영화로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티탄'은 호러라는 영화적 문법을 통해 젠더와 인간, 관계에 대한 고정관념과 경계, 규범적 시선을 벗겨낸 도전적 작품이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는 알렉시아(아가트 루셀)는 모터쇼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며 살아가던 중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일련의 사건에 휘말린다. 알렉시아는 경찰에 쫓기게 되면서 10년 전 실종된 소년 아드리앙인 척 모습을 바꾼 뒤 아드리앙의 아버지이자 소방관인 뱅상(뱅상 랭동)과 만나게 된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고 있던 뱅상은 아드리앙인 척 갑작스럽게 자신 앞에 나타난 알렉시아를 자신이 그토록 찾던 아들이라 믿으며 알렉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나선다. 그리고 알렉시아는 임신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침묵을 유지하며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간다.
교통사고로 인해 뇌에 티타늄을 심은 알렉시아는 자동차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남다른 애정을 보인다. 성인이 된 후에는 모터쇼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모습을 통해 젠더 고정관념에 대한 해체와 알렉시아의 차에 대한 성적 열망을 깊게 보여준다.
흔히 남성성의 상징이라 불리는 자동차와 남성들이 모인 모터쇼 속 스트립 댄서인 여성 알렉시아는 성적 대상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알렉시아는 어느 남성보다 높은 곳, 화염이 그려진 캐딜락 위에서 춤을 추고 남성들은 그런 알렉시아를 우러러본다. 이를 통해 대상화된 존재, 대상화해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선에서 벗어남으로써 남성성의 상징과 남성문화를 전복시킨다.
카메라는 그런 알렉시아를 로우 앵글로 비추고, 이후에도 로우 앵글로 포착된 성별의 구분이 모호해진 알렉시아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러한 앵글은 그가 고정적인 젠더와 시선을 넘어섰고, 감독이 고정되어 있고 규범화된 사회 질서를 새롭게 뒤집어 보고 있음을 알린다.
알렉시아는 어릴 때부터 냉랭했던 아버지, 성적으로 바라보는 남성들에 둘러싸여 살았다. 그런 그는 여자든 남자든 사람이 아니라 티타늄과 같은 금속성 물체인 자동차에 사랑을 느끼고, 결국 자동차와 성적 관계를 맺으며 임신하기에 이른다.
성적 취향에 대한 물음을 깔아놓은 영화는 이후 알렉시아가 몸에서 검은 기름을 쏟아내고, 벗겨진 피부 아래로 금속을 내비치며 인간과 금속이 결합된 트랜스휴먼의 형태로 변화함을 보여준다. 미친 듯이 자신의 배를 긁어댄 후 떨어져 나간 피부 사이로 보이는 티타늄은 마치 감독의 전작 '로우'에서 쥐스틴의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알렉시아를 둘러싼 사회가 규범화한 인간의 존재 내지, 전형적이고 고정적인 인간성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처럼 알렉시아의 몸은 변화해간다. 그러나 인간성이 벗겨져 나가는 동시에 알렉시아의 몸은 곳곳에 남은 검푸른 멍자국들을 통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신체 변형 과정은 인간적 속성뿐 아니라 젠더적으로도 경계를 오가게 된다.
이는 소방관인 아드리앙의 아버지 뱅상을 따라 소방서에서 지내며 영웅적 남성으로서의 훈련을 받던 알렉시아가, 남성성 가득한 소방관들 앞에서 스트립 댄스를 추는 장면에서 도드라진다. 극 중 리더인 뱅상 아래 모인 소방관들은 수직적 유대관계 속에서 지낸다. 뱅상은 절대자이고, 그런 절대자 뱅상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식의 구조다.
이처럼 남성성이 넘쳐흐르는 공간에서 소방관들은 제의적 몸짓 내지 집단 싸움처럼 보일 정도로 격렬한 춤사위를 벌인다. 그 안에서 알렉시아는 겉으로는 아드리앙의 몸을 한 채 소방차에 올라 스트립 댄스를 춘다. 이런 알렉시아를 바라보는 소방관들의 표정은 점차 기묘해지고, 그의 춤은 남성성과 젠더 정체성과 권력 등을 해체한다.
신체 변형과 젠더 해체, 트랜스 휴먼에 대한 이야기만큼이나 '티탄'을 중요하게 가로지르는 것은 상처받은 이들의 모습이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화염의 이미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상처와 트라우마라는 겁화에 휩싸인 알렉시아와 뱅상을 연결한다.
10년 만에 아들이라며 나타난 알렉시아를 본 뱅상에게 중요한 것은 '진짜 아드리앙'인지 여부가 아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후 10년 동안 상처받고 트라우마에 갇혀 있던 뱅상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매달릴 수 있는, 마음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지탱해 줄 믿음이다. 필요한 건 아들이 살아 존재한다는 믿음, 한 번은 실패했지만 이제는 지켜낼 수 있다는 다짐이다.
알렉시아에게 중요한 것 역시 갈 곳 없이 벼랑 끝에 내몰린 자신,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는 자신을 인간이자 한 존재로서 지탱해 줄 수 있는 임의의 존재다. 아드리앙의 모습을 뒤집어쓴 채 만난 뱅상은 알렉시아에게 구원 같은 존재가 됐다. 결국 극단에 몰려서 무언가라도 붙잡고 싶은 이들이 서로를 통해 각자의 삶을 구원받아보려는 애처로운 관계이기도 하다.
'티탄'은 전체적으로 대사와 대화가 많지 않은 영화다. 강렬하면서도 채도 낮은 색들로 채워진 화면에서 이미지와 배우들의 얼굴, 표정을 발견하며 감각적으로 다가가는 작품이다. 때로 알렉시아가 쥐스틴을 시작으로 쥐스틴 일행을 살해하는 과정은 마치 슬랩스틱이나 소동극처럼 만드는 등 연출적으로도 도전적인 면을 보인다.
재밌는 건 '로우' 속 등장인물의 이름인 쥐스틴, 알렉시아, 아드리앙이 '티탄'에도 그대로 나온다는 점이다. 이에 관객들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확장해나가는 감독의 커다란 우주를 전체적으로 이어서 바라보게 된다.
'티탄'이 비주얼적으로 충격적인 건 사실이다. 마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데이비드 린치가 결합한 것 같으면서도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만의 독특한 상상력과 색채에 놀라게 된다. 이미지만큼, 어쩌면 이미지보다 더 진득하게 잔상을 남기는 감정과, 감독이 심어 놓은 여러 가지 은유와 이미지를 해석하고 영화 내내 떠올랐던 다양한 물음을 곱씹어 보는 것이야말로 '티탄'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109분 상영, 12월 9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