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퍼' 최일도 목사… 진정한 감사는'그래서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여야


■ 방송 : CBS광장(CBS표준FM, 11월 21일(일) 오전 8시)
■ 출연 : 최일도 목사, 다일공동체 대표
■ 진행 : 고석표 교계뉴스부장

◇ 고석표 기자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CBS 광장을 진행하는 고석표 기자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지만 이른바 위드코로나 시기에 추수감사주일을 맞 는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중에서도 매일 한 끼 식사 해결이 힘들었던 사람들의 고통은 특히나 극심했을 것 같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위드 코로나 시기에 접어들면서 무료 급식이 조심스럽게 재개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오늘 CBS 광장에서는 얼마 전 창립 33주년을 맞아 무료급식을 재개한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를 모셔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또 이들과 함께 하는 오늘 추수감사주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얘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고석표 기자 : 최일도 목사님 어서 오십시오.

◆ 최일도 목사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고석표 기자 : 목사님께서는 위드 코로나 시기와 함께 맞는 추수감사주일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어떠신지요?

◆ 최일도 목사 :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눈물로 헹궈낸 맑은 눈빛으로 들여다보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눈물로 감사하는 추수감사 주일이네요.

◇ 고석표 기자 :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아무래도 거리 노숙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이 그동안 무료 급식 때문에 다일공동체를 찾았을 것 같은데 코로나 19가 시작되면서 무료급식이 중단됐잖아요. 그동안 노숙자들은 어떻게 끼니를 해결했을까요?

◆ 최일도 목사 : 그분들이 올 수가 없고 모이지 못하게 하니까 우리가 찾아갔죠. 동대문 구에서는 저희들에게 부탁을 하셨어요. 제발 좀 이분들을 찾아가달라고. 그래서 쌀과 음식을 실어서 아주 좁은 골목에 대부분 쪽방들이 모여 있거든요. 그곳으로 음식을 실어 날랐습니다. 그러면서 일대일 인격적 만남을 갖게 됐는데 그분들은 굉장히 더 감격스러워하고 좋아하시더라고요.

◇ 고석표 기자 : 오히려 코로나 때문에 직접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된 거군요.

◆ 최일도 목사 : 그렇죠. 이전에는 한꺼번에 1천명 가까운 분들이 왔다 가면 서로 나눌 시간들이 없잖아요. 먹고 가기에 바쁘니까. 그런데 이제 한 분 한 분 가정을 찾아가서 그분들이 모여 있는 처마 밑이나 지하차도나 그분들이 있는 곳에서 긴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가 있었죠.

◇ 고석표 기자 : 이분들은 사실 끼니를 해결하는 문제를 넘어서, 코로나를 겪으면서 어떤 위기에 놓였는 지도 많이 보셨을 것 같아요. 이들의 상황을 어떻게 지켜보셨는지요?

노숙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사회적 밀어내기'로 받아들여


◆ 최일도 목사 : 처음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이 나왔을 때 이분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였느냐 하면 거리두기는 밀어내기라고 생각한 거예요. 사회적 밀어내기구나. 우리를 이 사회가 밀어내고 있구나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사회적 거리두기란 표현도 사실 마뜩치가 않았었어요. 그래서 이걸 좀 바꿔달라고 부탁도 해봤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 두 달 쯤 됐을 때 당장 어떤 말이 나오느냐 하면 코로나로 죽기보다 배고파 죽겠네 라는 것이었어요, 무료급식소가 밥퍼 뿐만 아니라 서울에도 엄청나게 많고 전국에는 천 군데가 넘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중단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분들이 항상 어디든 찾아가기만 하면 먹을 수 있던 무료 급식소가 문을 닫고 나니까 한 달 만에 정말 수척한 얼굴로 나타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안 되겠다. 이분들을 찾아가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주소를 파악 못한 쪽방은 구청에서 도움을 받아서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구청 예산이란 게 동대문구 예산은 동대문구에 주소지가 돼 있는 분들만 이렇게 혜택이 가게 돼 있지 중랑구 노원구 서대문구 이런 데 오시는 분들도 많을 것 아닙니까? 심지어 저희는 서울시가 아닌 의정부 심지어 동두천, 수원, 인천에서 지하철 타고 오시는 분들 엄청 많습니다. 이분들이 코로나 1년을 지날 때 쯤엔 어떻게 얘기하느냐 하면 배고파 죽기보다 나 너무 외로워 죽겠어..아무도 찾아갈 데가 없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그 작은 쪽방에서 있는 그 어르신들이 큰 고통을 호소하시더라고요. 실제로 고독사하시는 분들이 많아진 거예요. 지난 한해 고독사로 돌아가신 분이 4천명 넘거든요.

그것도 다 통계가 된 게 아니라고 합디다. 확실한 것만 이렇게 되는데 지금 이미 2021년엔 이미 5천명을 넘었다는 얘기를 많이 하세요. 그런데 이제 그런 얘기들은 잘 공개를 안 하니까, 그러나 저희들은 이렇게 아무도 애도해하는 그런 사람 없이 홀로 외롭게 죽어가는 죽음들이 우리 주변에 이렇게 많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 이제 더 이상은 언론에서도 교회에서도 침묵하지 말고 이걸 다 드러내서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되기 전에 우리가 그들의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고석표 기자 : 무료 급식이 중단됐지만 다일공동체는 그래도 여러 가지 활동을 계속한 거죠?

◆ 최일도 목사 : 더 했죠. 어려움에 처한 후원회원들과 기업들이 이번에는 어려워서 조금 경기가 펴지면 후원하겠습니다 하는 분들도 많아져 예산은 줄었는데, 음식은 배가 더 늘어나는 거예요.

◇ 고석표 기자 : 배가 더 늘었어요?

◆ 최일도 목사 : 음식을 준비해서 포장을 했을 것 아닙니까? 포장해서 전달하는데 비용도 두 배 들고 시간도 두 배 들어요. 식당에 와서 앉아서 먹고 가고 우리는 또 한쪽에선 계속 설거지하고 치우고 하면 속도가 빠르지만, 이걸 일일이 포장을 해서 국을 담고 반찬과 밥을 따로 담고 포장해서 전달하는 과정이 준비하는 시간도 두 배입니다. 비용도 두 배…. 그래서 굉장히 큰 어려움이 있었죠.

◇ 고석표 기자 : 올해 11일은 다일공동체가 창립 33주년을 맞는 날이었죠? 올해부터 다시 무료 급식을 재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날 창립기념일 행사도 열렸는데 어떻게 진행 됐는지 소개 좀 해주십시오.

◆ 최일도 목사 : 무상급식을 하고 싶어도 당국은 모이면 안 된다고 그러고, 또 한 열 댓 명 스무 명만 모여도 동네 주민들이 신고가 들어와서 경찰이 출동하고 난리가 나요. 두려워하  는 거죠. 사람들이 저분들 통해 전염될까봐. 그러다가 위드 코로나 때문에 그래도 노상에서 밖에서 음식을 도시락을 드리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되니까… 오늘 도시락 타러 오신 분이 1천명이 넘습니다.

◇ 고석표 기자 : 1천명이요?.

◆ 최일도 목사 : 그날 11월 11일에는 천 오백 명 가까이 오셨어요.

◇ 고석표 기자 : 그렇군요. 다일공동체가 생긴지 33주년이 됐는데 목사님께서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33년 전 쌍굴
다리 아래서 처음 시작했던 때가 생각날 것 같아요. 처음 밥퍼를 시작하실 때 어떤 동기에서 시작하셨는지 기억나는 것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 최일도 목사 : 저는 빈민선교사역을 하려고 계획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신학교 다니는 동안 한 번도 그쪽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전 다만 이제 졸업반 때, 졸업반 한 1년 동안 학부 4년은 장로교회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제 별명이 그때 최신부였어요. 왜냐하면 성공회 신학교로 갈 걸로 친구들도 다 알고 교수님들도 알아서 '최 신부 이리 와봐,'그랬어요.

저는 그때 이미 성공회 성 베다교회에 다니면서 아내가 개신교 특히 장로교 예배에 적응을 못하니까 내가 한 걸음 아내 쪽에 다가가는 게 필요하겠다, 그리고 저는 예배는 클래식한 그러나 교단은 KNCC에 들어와 있는 성공회가 좋겠다고 생각하고 신부가 되려고 했었죠. 그런데 아내가 반대했어요. 안 된다고. 자기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왔으면 됐지 왜 당신이 또 자기 모교인 장로교를 떠나 성공회로 가려고 하냐. 목사가 되거나 신부가 되고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얼마든지 모든 걸 버리고 당신에게 맞춰서 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니까 곧 적응할 거라고 하면서 제가 장로교 목사가 되길 간청했어요.

그래서 저는 장신대 신대원으로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신대원 졸업반 때 아내하고 약속한 거예요. 유학을 가기로. 그래서 저는 당연히 우리 선배들이 많이 가 있는 독일로 가려고 했고 선배들도 오라고 했고, 그랬는데 아내는 뜻은 같았는데 장소만 틀려요. 프랑스로 가재요. 왜 개신교 목사는 전부 미국 아니면 독일이냐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너무 좋은 개신교 신학대학이 있는데 거길 가자고 아내는 프랑스, 그리고 저는 독일로…, 그랬더니 하나님이 너희들은 청량리로 가라고 밀으셔서 청량리로 간 게 정말 하나님 발길에 채였다고나 할까, 제 뜻이 아니었어요.

'밥 퍼 사역'은 두 명의 할아버지로 인해 시작


그날이 바로 1988년 11월 11일, 청량리 역 광장에서 내 눈 앞에서 쓰러진 할아버지 한 분을 본 거예요. 나흘을 굶어서 길에 쓰러진 할아버지가 제 인생을 바꿔 버린거죠. 함경도 할아버지였는데, 함경도에서 피난 내려온 분인데 그 분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본인도 말을 안 하셔서 아무도 몰라요. 그렇게 살다 돌아가셨어요.

그날 함경도 할아버지에게 '아직도 식사를 못하셨어요? 하루 세끼를 다 굶어서 어떻게 하냐'고 내가 걱정했더니 손을 이렇게 네 개를 펴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세 끼를 굶은 게 아니고 네 끼를 굶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니 나흘을 굶었어' 그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수도 서울 한 복판에서 이렇게 올림픽도 개최한 우리 대한민국이 왜 나흘을 굶도록 방치할까. 그래서 그 한 분에게 밥을 해드린 것이 하루 이틀 하다 보니 1년, 2년 됐고, 10년 20년 지나 벌써 30년 지난 거지. 무슨 계획 없어요. 무슨 뜻이 있어서 한 거 아닙니다.


◇ 고석표 기자 : 또 30년 넘는 기간 동안 기억나는 사건들이나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 게 기억납니까?

◆ 최일도 목사 : 가장 큰 기억은 역시 또 한 분의 할아버지인데 제가 한 5년 간 배식을 하다가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못하겠다 하고 용문산으로 도망갔는데 거기서 용문사절 위에 큰 마당바위라고 있는데 거기서 처량하게 사흘 굶으며 굶식기도를 했죠. 금식기도가 아니라. 당시에 무료급식 만 5년 지났을 때 어머니도 반대, 아내도 반대, 그때 제 아들도 저를 끌어안더니 '아빠 나 창피해 죽겠어'그러더라고 '왜 창피하냐' 그랬더니 아빠 왜 아빠는 이렇게 살아야 돼? 그러는 거예요.

◇ 고석표 기자 : 밥퍼 활동을 반대하신 거예요?
   
◆ 최일도 목사 : 동네 사람들이 아빠 진짜 목사 맞냬요?. 무슨 목사가 거지들 밥만 해줘, 예배당도 없고. 그 말에 제가 너무 충격을 받았죠. 그리고 한 5년 하니까 관두라는 사람들 밖에 없더라고요. 그만하라고. 지원해주던 사람들도 이제 그만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끝나는 게 정말 옳은 건가 물었는데, 용문산에서 한 사흘 굶고 나흘째 됐을 때 어디서 밥하는 냄새가 나서 찾아가 보니까 진짜 텐트를 쳐놓고  뜸을 들이는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이 산 저 산 다니면서 약초 캐는 할아버지인데 이 분이 제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너 밥 거저 얻어먹으려고 그러지?' 딱 그러더라고. '멀쩡한 놈이 거저 먹을 생각을 하냐?', 그래서 '죄송합니다' 하고 그냥 갔어요. 제가 기도하던 바위로.. 그랬더니. 다시 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더라고요. . 갔더니 '나 그렇게 야박한 인간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너 이 밥 먹고 내 부탁 하나 들어줘라' 그래요. '어르신 부탁이 뭡니까?' 그랬더니 '청량리를 가래요. 나더러. 왜 청량리를 가요? 했더니 '거기 최일도가 밥 거저 줘. 너 모르냐. 너 못 들어봤냐?'.. 그래.

◇ 고석표 기자 : 목사님이 최일도인 줄 모르고.

◆ 최일도 목사 : 그때 제가 얼마나 소름이 끼쳤겠어요. 그때 최일도가 최일도를 찾아가는 그게 진정한 저의 거듭남이에요. 함경도 할아버지가 역 광장에 쓰러졌을 때는 인간적인 내가 뭔가를 해보겠다는 마음이 컸었을 텐데, 모든 사람 반대, 아내와 어머니도 반대, 모두가 반대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 할아버지가 너 청량리 가라 그러더라고요.
그것도 최일도 한테, 최일도인 줄 모르고 최일도 찾아가라. 밥 거져 줘. 야, 밥만 얻어먹지 말고 리어카 하나 사달라고 해서 인생 새로 시작하래요. 저는 그걸 하나님 음성으로 들은 거예요. 그 분을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함경도 할아버지, 용문산 할아버지가 저를 저되게 하신 거죠.

◇ 고석표 기자 : 그렇군요. 어떻게 보면 그 두 분 때문에 지금까지 사역을 이어오게 된 계기가 되셨겠네요. 목사님 하면 많은 분들이 밥퍼 목사님으로 기억하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밥퍼가 아니라 빵퍼 사역도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사역인지 소개해 주십시오.

밥 퍼에서 빵 퍼 사역으로


◆ 최일도 목사 : 밥은 사람들이 와서 먹어야만 되잖아요. 또 우리는 밥 문화가 국이 없으면 밥을 먹었다고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와서 먹는 음식,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번에 코로나를 겪으면서, 이제는 찾아가야 되겠다. 도저히 거동이 불편해서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섬김이 아니고는 고독사 위기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길이 없어요. 문을 두드려야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하루에 5천개 빵 만드는 빵 기계를 갖다놨어요. 지금.

◇ 고석표 기자 : 5천개요?

◆ 최일도 목사 : 상상이 안 되죠? 웬만한 큰 오븐은 제과점에서 하는 건 한번 구우면 30개, 많아야 50개입니다. 그런데 이건 한번에 360개, 조그마한 빵은 400개 이상도 만들어요. 그래서 하루에 5천개 이상을 만드는데 순수 밀가루 비용을 계산해봤는데 기가 막혀요, 52만원

◇ 고석표 기자 : 52만원 생각보다 많진 않네요.
   
◆ 최일도 목사 : 많지 않죠. 그러니까 50만원이면 5천명이 먹을 수 있으니까 우리가 근검절약하고 아끼면 50만원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요. 그리고 생일 날, 기념일 날 50만원 이상 더 써요. 제발 우리 앞으로 오병이어를 생각하시고 내가 그거 한번만 한 셈 치고 후원하면 5천개 빵이 나눠지니까…

◇ 고석표 기자 : 목사님, 그런데 한국 교회가 오래 전부터 공동체성이 부족하다, 공공성이 부족하다 이런 비판을 많이 받았잖아요. 감사의 마음이 부족하다 보니까 나눔의 정신, 또 희생하거나 헌신하겠다 이런 마음도 부족해진 것 같아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의 이런 민낯이 드러나는 그런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해요. 목사님께서 이를 어떻게 보셨나요?

◆ 최일도 목사 : 우리 한국 사회는 지나친 개인주의, 이기주의, 물질주의로 치닫고 있을 때 교회가 극복해내지 못하고 교회마저도 개 교회주의 개 교단주의에 함몰되면서 교회가 스스로 자정도 못하고 비난을 받았죠.

이 코로나를 겪으면서 정말 이것이 어떻게 보면 위기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바닥까지 처절하게 한번 내려가봐야 다시 우리 스스로가 정화되면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거듭 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봐요.
당장 미자립교회 개척교회 이런 아주 어려운 목회자들은 이미 스스로 나가서 벌지않으면 못 견디니까 투 잡 쓰리 잡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텐트 메이커가 돼가는 거죠. 바울을 본 받아. 저는 진즉에 외쳤어요. 그렇게 해야 그래야만 된다고.

그래서 목회자들도 '오라 엣 라보라 Ora et Labora' 정신으로, 기도가 노동이요 노동이 기도이고, 노동현장에 가서 같이 노동하는 목사들이 됐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30년 전부터 했고 저 자신도 그렇게 노동하면서 살아왔고, 그래서 저는 오히려 비관적이지만 않다. 교회가 교회 돼가는 모습들로 자리 잡아 가는 모습이 보여요.

빅 이즈 석세스(BIG IS SUCCESS)가 아니라 스몰 이즈 뷰티풀(SMALL IS BEAUTIFUL) 이 정신 이 마음이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올 추수감사주일은'그래서 감사'가 아니라 그래도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이런 눈물겨운 감사가 곳곳에서 이미 많이 들려와서 좋아요. 감사해요.

◇ 고석표 기자 : 많은 분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사회는 그전과 많이 다를 것이다. 또 한국 교회도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전망을 많이 내놓고 있거든요. 그러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될 경우 한국 교회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지가 매우 중요할 것 같아요. 한국교회는 앞으로 가난한 이웃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 지요?

◆ 최일도 목사 : 저는 얼마 전에 대형교회 목사님이신 우리 장로교회 목사님을 만났어요. 그 분에게 목사님, 교회와 성도들만 돌보는 교구 목사 중에서 한 명 많으면 두 세 명이라도 비 기독교인들을 돌보는 목회자로 세워주세요, 이름하여 그런 분들이 마을목사입니다. 그 마을에 소외된 이웃들을 섬기는 목사, 내 교회 성도들만 쫓아다니고 심방하고 그런 목사들이 아니라 무의탁 노인 찾아가고 고독사 위험 속에 있는 사람 찾아가서 문 한번 두드려보고, 믿지 않는 마을 주민들도 목회의 대상이라고 여겨야지 내 교회 등록하고 출석한 사람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찾아가야 되는 목사가 돼야 되죠.


◇ 고석표 기자 : 이제 목사님 개인적인 근황도 여쭙고 싶은데요. 우선 축하드려야 할 일이 있어요. 지난 12일이죠. 제21회 올해를 빛낸 인물 대상 시상식에서 사회공헌 부분에서 상을 수상하셨는데 조금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또 올 봄에는 책도 내셨죠?  최일도의 러브스토리 이런 제목인데… 최근 목사님 근황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 최일도 목사 : 예.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이란 책을 동아일보사에서 냈을 때가 벌써 26년 전이에요. 그게 베스트셀러가 될 줄 꿈도 못 꿨죠. 그걸 읽은 사람이 꽤 많았는데 100만권 이상이 나갔으니까.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책 나온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많으니까.. 젊은 사람들이 좀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 국내 사역으로 제한돼 있었지만 이렇게 해외 열 한 개 나라, 스물 한 개 분원으로 흩어지기까지 하나님의 참 손길 이런 걸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좀 만나 봤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옛날에는 최일도의 러브스토리였는데 두 번째는 하나님의 러브스토리로 이렇게, 주어가 최일도가 아니라 하나님이란 입장으로 써 본 게 지난 봄에 나온 러브스토리예요.

◇ 고석표 기자 : 아까 올해부터 빵퍼 사역을 시작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목사님 사역이 점점 확장돼 가고 있다는 느낌이거든요. 목사님께서 소망하시는 사역의 비전 나눠주시면 어떨까요?

◆ 최일도 목사 : 아무래도 북녘 땅의 우리 형제들, 그들에게도 이 따뜻한 밥 한 그릇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 빈민촌마다 이 빵이 이렇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생각이 한시도 떠나지 않아요. 그래서 사실 우리가 맨처음 중국 고아원을 세웠던 건 북한에 가기 위해서 교두보로 북한 바로 접경 지역인 훈춘에 세웠던 거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찾아갈 수 없고 나누지 못하니까 참 안타깝고요. 우리 바라기는 평양과학기술대학 식당만이라도 우리 북녁에 계신 분들이 허락해주신다면 가서 식당에서 밥 퍼 드리고 싶어요. 우리 학생들을.

◇ 고석표 기자 : 해외에 있는 다일공동체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지원은 안 되나요?

◆ 최일도 목사 : 그게 가능하니까. 이제 제가 항상 상주한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고 허락도 안 할 것이고 시민권 가진 분들은 과거에 다 자유롭게 다녔잖아요. 그러니까 미국 캐나다 해외에 있는 분들을 우리가 한국에 모시고 와서 Discipleship Training School, DTS 훈련을 해요. 그 분들이 제법 많아졌어요. 그걸 설곡산 다일공동체에서 우리가 전담하고 있는데 그런 분들이 좀더 많아져 가지고 국경을 초월한 우리 사회가 있는 것처럼 국경을 초월한 나눔 섬김의 일꾼들이 좀 더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으면 좋겠어요.

◇ 고석표 기자 :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고 다음 주일은 대림절이 시작되는 주간이잖아요. 목사님 다일공동체에서 해마다 여는 거리성탄절 노숙인 예배가 유명하잖아요. 올해는 어떻게 진행될까요?

◆ 최일도 목사 : 지난 해는 못했어요. 올해는 34번 째인데 거리에서 드리는 게 가능하니까..그래서 문화체육관광부하고 NCC하고 저희들이 공동주관으로 해서 정말 예배당도 성당도 문턱이 높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향해 낮은 곳에서 드리는 예배니까… 그날 오시는 분들은 2년 만에 오시는 분도 있고 1년 몇 개월 만에 오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 얼마나 보고 싶은지 기다려지는지, 거리 성탄예배 때는 많이 올 때는 3천명 까지 와요.


◇ 고석표 기자 : 오늘 추수감사주일인데요. 코로나 시대 맞으면서 우리가 감사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사해야 되는 이유가 있다면 끝으로 대담 마무리 하면서 오늘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그래서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여야


◆ 최일도 목사 : 받은 게 많아서 또는 가진 게 많고 높아져서 누리니까 감사, 그래서 감사 보다…그건 사실은 진정한 감사의 정신 아닌 것 같고요. 그래도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이런 좀 깨어 있는 영성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감사가 아닐까 싶어요. 하박국 선지자가 외양간에 소 한 마리 없어도 감사, 우리 창고에 곡식 한 톨 없어도 감사,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게 진정한 감사죠. 존재로 인한 감사지 뭐 어떤 우리가 기복신앙에 의하여 참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출세한 것에 대해서 돈을 많이 번 것에 대한 감사, 그건 사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 그야말로 범사에 감사하라 했는데 일체 은혜 감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고 조건인데도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감사해요, 이게 터져 나와야 진정한 감사인 것 같아요. 이코로나 때 처절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 그렇게 감사하는 전 가난한 영혼들 너무 많이 봤어요. 정말 저는 그래서 정말 감격했어요. 이 분들이 있구나. 이 분들로 다시 교회는 시작되겠구나 싶었어요. 낮은 곳에 내려가면 이분들 만날 수 있어요. 궁금하면 청량리 와서 그분들 만나주세요.

◇ 고석표 기자 : 알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목사님 말씀, 그리고 그 감사를 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영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목사님 말씀해주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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