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삶의 짐 짊어진 발걸음서 발견한 '행복의 속도'

영화 '행복의 속도'(감독 박혁지)

영화 '행복의 속도' 스틸컷. ㈜하이하버픽쳐스·㈜영화사 진진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주인공들 발걸음도, 전반적인 호흡도 느리다. 그래서 보는 관객이 오히려 조급해질 수 있다. 빠름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영화 '행복의 속도'는, 매일 짐을 짊어지고 자연과 삶을 되새기는 봇카들의 발걸음에 맞춰 호흡하도록 만든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시간만큼은 물리적 시간에서 멀어져 차분하면서도 평화로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해발 1500미터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일본 오제에는 걸어서 산장까지 짐을 배달하는 '봇카'가 있다. 봇카가 짊어지는 무게는 평균 70~80kg, 많게는 100kg에 달할 때도 있다. 그들은 일주일에 6일을 무거운 짐을 등에 진 채 적게는 8㎞, 멀게는 12㎞ 떨어진 산장까지 도착해야만 한다.
 
오제에서 일하는 봇카 이가라시와 이시타카 역시 매일 무거운 짐을 지고 같은 길을 걷는다. 24년 차를 맞은 베테랑 봇카 이가라시는 매 순간 오제의 길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간다. 일본청년봇카대 대표이자 9년 차 이시타카는 봇카를 널리 알리고 싶어 한다. '행복의 속도'는 닮은 듯 다른 두 봇카 이가라시와 이시타카, 그리고 오제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 '행복의 속도' 스틸컷. ㈜하이하버픽쳐스·㈜영화사 진진 제공
'춘희막이' '오 마이 파파'로 인물들을 차분하게 따라가면서 동시에 삶에 관해 질문했던 박혁지 감독이 이번엔 '행복의 속도'를 통해 우리의 삶과 행복에 관해 비슷하면서도 다른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오제에 담긴 자연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서로 다른 걸음걸이와 속도로 걷는 두 명의 봇카를 하나의 스크린에 펼쳐냈다.
 
베테랑 이가라시와 봇카 일을 위해 도시에서 온 이시타카는 경력도, 일하는 스타일도, 추구하는 방향도, 걷는 속도도 모두 다르다. 서로 다른 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바로 봇카로서의 보람과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건 오롯이 이가라시와 이시타카 개인의 발견이며 각자의 행복이다. 다른 누군가의 말이나 시선과 무관하게 둘이 매일 오제를 걸으며 발견한 행복이다.
 
영화는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발걸음을 따라 매일 묵묵히 짐을 짊어지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비춘다. 반복되는 일상, 반복되는 일, 달라질 것 없는 길이 계속 이어진다. 마치 매일 반복되는 아침을 맞이하고, 반복되는 삶을 사는 우리처럼 말이다.
 
영화 '행복의 속도' 스틸컷. ㈜하이하버픽쳐스·㈜영화사 진진 제공
그러나 똑같은 듯 보여도 매일 매 순간이 처음 마주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같은 듯 보이는 오제도 관심을 갖고 세심하게 바라보면 매일 다른 모습으로 봇카들을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의 구름은 어제의 구름이 아니고, 오늘의 바람 역시 어제의 바람이 아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순간, 바쁘게 오가느라 변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지만, 빠름을 배제하고 무심과 무관심을 내려놓고 바라보는 일상은 매일 다양한 변화로 가득 차 있다. 두 봇카의 발걸음을 묵묵히 뒤따르다 보면 이러한 일상 속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스크린 안에서도, 우리의 안에서도 말이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가 그 누구보다, 매 걸음마다 달라지는 오제의 섬세한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만의 속도로 매일 오제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오제와 사람은 각자의 존재를 존중하며, 각자의 삶 혹은 변화의 속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보채지도 않는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봇카들은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인생을 걸어간다는 의미를 누구보다 온몸으로 매일 체득한다.
 
특히 이가라시는 마치 묵묵히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의 모습과 닮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걷는 '현재'의 발걸음에 집중한다. 한 걸음, 한 발자국에 담긴 이가라시의 마음은 그가 자신의 행복을 과거나 미래라는 먼 곳, 다시 말해 지나간 길이나 가지 않은 길이 아닌 자신이 발 디딘 지금 이곳 오제의 땅 위에 서서 한 걸음씩 내딛는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렇기에 이가라시를 비롯한 봇카의 걸음을 보면 마치 우리의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지금도 삶의 짐,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늘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지만 짐에 짓눌리고 타인과 사회의 속도에 채근당하며 매일의 변화와 행복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어디에 둘 것인지, 우리는 누구의 속도로 걸어갈 것인지 봇카와 오제를 통해 되돌아보게 된다.
 
영화 '행복의 속도' 스틸컷. ㈜하이하버픽쳐스·㈜영화사 진진 제공
두 봇카의 다른 듯 닮은 삶만큼이나 '행복의 속도'를 접할 관객에게 큰 울림을 전해주는 것은 역시 오제다. 감독은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오제의 빛과 색, 소리를 오롯이 담아내려 했고, 덕분에 오제의 변화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다. 오제라는 공간은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계절마다, 그리고 매일 매 순간 다른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그런 오제의 풍광을 스크린으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지친 일상에 놓인 관객들을 잠시나마 위로한다.
 
빠르게, 그리고 나의 속도를 잃은 채 점차 나를 잊어가는 사람들, 나의 행복을 놓쳐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속도'는 때로는 천천히 걸어가며 나와 나의 행복을 돌아보길 권한다. 스크린을 나서면서 나에게 맞는 나만의 속도는 무엇인지,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한지 질문하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 또한 '행복의 속도'를 즐길 수 있는 팁 중 하나다.
 
114분 상영, 11월 18일 개봉, 전체 관람가.

영화 '행복의 속도' 포스터. ㈜하이하버픽쳐스·㈜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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