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동한 "춘천시민 자긍심 회복, 세계 최고 도시로"

강원CBS<서정암의 시사줌人> 육동한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이사장 인터뷰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전국 13개 센터 중 가장 성과를 내고 있다는 자부심"
"기획재정부 경제 관료 출신 경험, 지역 경제 전문가로서 역할도 유효"
"춘천을 '최고 교육지대'로 만들어 젊은이와 인재들이 떠나가지 않도록 할 것"

■ 방송 : 강원CBS<서정암의 시사줌人>(13:05~13:30)
■ 제작 : 강민주 PD
■ 진행 : 서정암 ANN
■ 대담 :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육동한 이사장
 
◇서정암> 오늘 주인공, 이야기 나눠보기에 앞서 소개를 드리면요. 기획재정부 정책조정국장,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등 두루 거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고향인 춘천으로 돌아와 강원연구원장, 강원창조혁신센터 이사장 등 지역 발전에 힘쓰고 있는 분인데요,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육동한 이사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육동한 > 안녕하십니까.
 
◇서정암> 제가 요약을 해서 이사장님을 소개해 봤는데 빠졌거나 좀 틀린 부분 이런 게 있을까요?
 
◆육동한> 빠진 거는 꽤 많지만 그걸 다 여기서 얘기하면 아마 방송 진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하. 우선 춘천시장 출마를 선언한 사람 중 제가 처음으로 초대된 것 같습니다. 대단히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요. 소개하실 때 과거는 과거지만 제가 지역 발전을 위해서 애를 쓴다고 말씀해 주신 점이 굉장히 감사합니다. 실제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서정암> 먼저 지금 몸 담고 계신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이름을 들으면 많은 분들이 '어떤 곳이다' 이렇게 감은 오시겠지만, 정확하게는 모르실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육동한>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는) 박근혜 정부 때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바뀌어도 생존하고 있는 그런 조직인데요. 전국에 다 하나씩 있고요. 그 지역마다 다 특성 있는 산업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 지역이 갖고 있는 특유의 산업을, '창조의 힘'으로 '혁신의 힘'으로 또 '젊음의 힘'으로 키우고자 하는 그런 기관이 되겠습니다. 강원도에는 강원대학교에 있고요, 강원도센터는 주로 IT라든지 창업, 로컬 크리에이터 등 아주 새로운 분야를 하고 있고요. 전국의 센터마다 대기업하고 제휴가 되어있는데 우리 강원도센터는 특이하게 우리나라 최고의 IT 전문 업체인 네이버하고 제휴해서 이걸 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알기로는 강원도센터가 전국 13개 센터 중에 가장 잘하고 가장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이사장으로서 아주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서정암> 아 그렇군요. 우리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가 13개 중에 최고다?
 
◆육동한>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서정암> 또 여러 곳에서 이사를 하고 계세요. 산업은행에서도 하고 계시고 국립춘천박물관에서도 그렇고요. 바쁘시지 않으세요?
 
◆육동한> 우선 부름 받는 게 굉장히 영광이죠. 시쳇말로 돈 되는 건 많지는 않지만 제가 필요해서 가서 봉사할 수 있게 하고 또 제가 그 기관에 어떤 역할을 하고 도움을 준다면 대단히 고마운 일입니다. 저처럼 인생 후반기에 들어선 사람들은 그런 일을 많이 해야 노후가 행복하고 또 남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불러주시면 제가 무보수로 많은 이사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생 젊어서는 많은 고생하고 일을 하지만, 나이 들면 봉사를 생각하는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서정암> 육동한 이사장을 수식하는 말 중에 하나가 '경제 전문가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육동한 >제가 기획재정부 출신이죠. 공무원이 돼서 선택한 부처가 경제기획원이었습니다. 왜 거길 갔냐면 제가 고등학교 때 사회를 배우면서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하면서 빠르게 전후 빈곤을 극복하고 개발도상국이 된 걸 배우고 굉장히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 나도 이 다음에 저런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우연히 제가 공직에 경제기획원을 들어갔는데요. 정말 재미난 거는 제가 아까 얘기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담당하는 사무관이 됐어요. 너무 신기했습니다.
 
저는 경제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고 어려움이 많이 있었죠. 예산, 산업정책, 정책조정, 제가 경제 분야에 안 한 일이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들어가서 일한 데가 그 당시에는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입니다. 그런데 거기가 상징적으로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엔진이거든요. 처음 왔을 때 '어쩜 내가 이런 데도 다 왔나'하고 신기해하고 고생도 했습니다만. 세월이 지나서 제가 그 국 국장이 됐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명예롭고 아주 대단한 순간이었죠. 제가 공직하면서 국정 전반을 다뤘지만은 그래도 저의 기본은 경제고 제가 기획재정부 출신이라는데 있습니다.
 
특히 2008년도에 우리나라에 금융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주무국장이 되어가지고 몇 달을 아주 죽을 고생을 했어요.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을 한 것들이 다 제 어떤 과거의 흔적입니다. 그래서 아마 경제 전문가로 칭하는 게 저로서는 굉장히 명예스럽고요. 또 우리 고향도 경제가 많이 어렵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 다음에 젊은이들이 아직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여기서 희망을 갖지 못해 떠나는 그런 사회가 되는 것 같아요. 모든 것은 결국은 경제와 일자리로 통하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이 지역에서 경제 전문가로서 제 역할이 아직은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육동한 이사장. 강민주 PD.
◇서정암> 대학교 3학년 때 (행정고시) 합격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왜 공직자가 돼야겠다고 생각을 하셨나요? 경제(분야)를 좋아하시면 금융권이나 이런 데를 갈 수 있었을 텐데요.
 
◆육동한> 그건 뭐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이 인생이 정해지는 거는 본인의 의지도 있고 우연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같은 서클의 대학 선배들이 행정고등고시 얘기 많이 했어요. 그게 아마 뇌리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제가 평생 공직을 하신 공무원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어떤 공직의 어떤 분위기에 굉장히 익숙했던 것 같아요. 거기에다 결정적인 거는 제가 1978년도에 서울 가서 대학 시험을 봤는데 떨어져 버렸어요. 재수를 하려는 차에 다른 대학에서 장학생 요청이 왔습니다. 근데 장학생 요청이 왔는데 조금 부수적인 조건이 있었는데 '와서 고등고시를 공부하면 좋겠다'라는 거 였어요. 대학 떨어진 죄송함에 저항을 못하고 제가 그 대학을 가서 공부를 했는데 자연스럽게 공직에 입문하게 됐죠. 근데 그때는 불만도 있고 '아 내가 벌써 이걸 해야 되나' 하는 좌절도 있고 했지만 지나고 나니까 '모든 것이 다 정해진 길로 갔구나' 하면서 그 당시 상황, 또 그때 저한테 공직을 권했던 분들, 특히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께 굉장히 감사하고 있고 그 덕에 제가 근 30여 년 중앙정부에서 요직을 다 두루 겪으면서 국가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지 않았나 하면서 지금은 감사한 마음입니다. 공직은 어쩌면은 저의 천직이고 다시 태어나면은… 아마 할지는 모르겠어요. 할 겁니다. 아마.
 
◇서정암> 그런데 바로 공직에 입문을 하지 않으셨다는 건 무슨 얘기죠?
 
◆육동한 >3학년 때 조기 합격을 했죠. 그래서 4학년 때 1년의 시간이 저한테 주어졌습니다. 사실은 3년 동안에 아주 열심히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많은 시간을 공부에 할애를 했죠. 그래서 조금은 좀 평범한 대학생으로서 다른 생활을 좀 하다가 졸업한 다음에 임용을 받으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제 어느 분이 찾아와서 제안을 합니다. 평범한 대학생활을 더 즐기고 행정고시에 붙었으니까 1년 동안 바짝 해가지고 공인회계사까지 따고 공무원이 되려고 그랬는데요.
 
◇서정암> CPA를 하려고 하셨군요?
 
◆육동한> 그때 하지 못했어요. 책만 사놓고. 그런데 그 무렵에 어느 선배가 찾아오셔가지고 저보고 야학을 권하는 거예요. 저는 그때 그 한마디에 제가 그 무슨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 것처럼 그냥 바로 하겠다고 그랬습니다. 마음이 그냥 가서. 첫째는 그 권한 분이 제가 너무 좋아하는 대학 선배고 그 선배도 바로 행정고시 제 앞 기수에 3학년 때 최연소로 된 분이에요. 그분도 이제 4학년을 그렇게 야학 교사로 한 분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권유하면 따라가잖아요. 좋은 선배가, 더군다나 이제 공직도 제 선배가 될 분이 권유를 했고 또 그 시절이 민주화 세대입니다. 5·18도 있었고 하던 어려운 격랑 노도의 시대인데 저도 뭐 데모도 하고 뭐 다 했지만은, 그때 굉장히 고생하고 희생한 내 또래의 분들에 비해서는 저는 비교적 안온하게 지내지 않았느냐 하는, 시대를 지나는 학생으로서의 어떤 부채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공무원이 되기 전에 큰 건 아니지만 이런 행위를 하는 것도 그런 마음의 빚을 좀 덜 수 있지 않나하는 얄팍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1년 동안 야학을 한 장소가 어디냐 하면은 서울 도봉구 쌍문동입니다.
 
◇서정암> 요새 핫한 '쌍문동'이네요.
 
◆육동한> 결과가 그렇게 됐어요. 병원 지하에서 1년 동안 참 열심히 주변 공단의 아이들과 어울리고 열심히 야학을 하고 1년을 지냈죠. 그래서 요즘 뭐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인가요? 그게 쌍문동이거든요. 제가 야학을 한 시기가 1981년이거든요. 그래서 저한테는 '응답하라 1981 쌍문동'. 이렇게 그 시절을 회고하곤 합니다.
 
◇서정암> 이 야학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좀 느끼실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육동한> 정치 상황도 복잡하고 아무래도 우리가 당시 미흡했던, 충분히 케어가 되지 않았던 노동 현실이 많이 드러나는 그런 시대였죠. 그래서 제가 짧은 시간이지만 저랑 같이 공부하던 아이들을 통해서 그런 현실을 보게 되는 창을 얻게 된 거죠. 가끔은 저도 저였지만은 이 아이들의 장래를 저도 걱정을 하게 되고 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로는 제가 아까 경제기획원을 갔다고 했는데, 이러지 말고 제가 어떤 노동 현실을 더 알고 우리 근로자들의 노동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동부를 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결국은 제가 원하던 대로 갔지만 그렇다고 그런 부분들, 우리가 개발 연도에 우리가 미흡했던 것 부족했던 부분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건 아니고요.
 
말하자면 노동, 복지, 교육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당시 이슈가. 그래서 제가 경제기획원 또 기획재정부까지 일을 하면서 평생 저의 주된 업무 테마였죠. 공직이, 경제 관료가 일하는 것은 어떤 기업을 흥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은 경제의 어떤 그늘들을 갖다 치유하고 발전 지키는 데 일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야학의 경험은 경제 관료로서, 경제 관료를 떠나서 국정 전반을 다뤘던 제 입장에서는 중요한 테마고 과제고 하나의 숙제였죠. 그 점은 뭐 지금 공직 떠난 지 오래됐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제가 자주 글을 쓰는데 글 쓰는 많은 테마도 그런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육동한 이사장(좌). 강민주 PD.

 
◇서정암> 소위 말해서 기획재정부에서 요직을 거친 다음 금융권이나 사기업 같은 데서 스카웃이 들어온다던데 안 가고 고향으로 돌아오셨어요. 이유가 있을까요?
 
◆육동한> 그게 참 어려운 얘기인데 제가 정부 나와서 강원연구원에 올 때까지 한 1년 반 정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굉장히 많은 제안을 받았어요. 대학, 기업, 연구소 등. 실제로 대학원을 가서 강의도 하고 그랬습니다만 실질적으로 고정적으로 몸 담은데는 없고 버티고 버티다가 온 곳이 바로 고향인 강원도에 강원연구원장으로 내려왔죠.
 
이건 두 가지일 겁니다. 고향에서 제가 필요하다는 그런 제안은 참 뿌리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동안 여러 가지 자랑삼아 얘기했지만 그 모든 것은 고향인 춘천, 강원도에서 받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또 고향을 위해서 기여하고 같이 일하자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웠고요. 또 그 당시에는 어머니, 노모가 계셨어요. 일부러라도 와서 여생이 많지 않으신 어머님을 모셔야 되는데, 기회가 있었는데도 안 온다는 건 나중에 얼마나 제가 후회를 할까 하는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내려와서 일한 게 벌써 8년이 됐습니다. 그래서 8년이란 시간이 화살처럼 지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감사하고 고향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제가 고향을 위해서 조금 더 봉사를 하려고 마음먹고 지금 노력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서정암> 고향에 와보니 '이런 것들이 좀 내가 생각한 거하고 좀 다르네', '이게 아쉽네' 이런 것도 있을까요?
 
◆육동한> 뭐 다 좋은 곳이죠. 춘천이 굉장히 아름답고 좋은 곳입니다. 제가 옛날에 서울에서 일할 때 제 동료들한테 고향 자랑을 이렇게 합니다. "우리 고향 춘천은 어쩌다 가서 돌아서서 30분만 올라오다 보면은 그새 그리워져. 너 이런 데 있냐?" 이게 제 춘천에 대한 저의 진정한 마음입니다. 춘천은 굉장히 좋은 도시입니다. 자연적으로나, 사이즈로나, 도시가 갖고 있는 어떤 특성(으로나요). 그런데 지금은 좋은 점도 있지만 못 미치는 면도 많지 않나 생각하고요.
 
특히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경제적으로 좀 어려워서 이 지역의 젊은이들이 고향인 이곳에서 미래를 찾지 못한다거나, 또 경관이 너무 많이 훼손됐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는지 걱정이 많습니다. 필요하면 개발도 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역이 갖고 있는 가치가 훼손될 정도로 굉장히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 다음에 어떤 이유든지 시민들의 어떤 자신감, 자긍심, 그런 것들이 옛날 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왜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한 번 원인을 잘 진단해서 다시 수리를 좀 해야 될 것 같아요. 수리를 하고 이 좋은 조건을 가진 춘천을 전국 최고의 도시로 다시 업그레이드 시켜야져야 않나 하는 그런 고민을 좀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서정암> '이건 내가 진짜 잘할 수 있다'하는 게 어떤 게 있을까요?
 
◆육동한> 경제 전문가는 아까 제가 계속 자랑을 했으니까 생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저는 이 모든 것의 기초는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역할을 하면서 춘천, 더 나아가서 강원도 교육을 재구조화해 가지고 전국 최고의 교육 지대로 만들려 합니다. 제가 경제 관료로 일할 때지만 기재부에서 가장 신경 쓰고 일을 많이 한 부분이 교육 정책입니다. 춘천을 최고의 교육 지대로 만들면 경제고 문화고 예술이고 모든 것이 거기서 다 해법이 나옵니다. 적어도 춘천에 좋은 젊은이들, 인재들이 교육 때문에 어려서 이른 나이에 서울로 빠져 나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굉장히 심각하고 중요한 얘기입니다.
 
◇서정암> 마지막으로 듣고 계시는 청취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육동한> 아까 말씀드렸습다만, 춘천이 얼마나 좋은 도시인지, 물론 다소 문제를 얘기했지만요. 미래의 어떤 트렌드, 산업의 경영이나 또 춘천이 갖고 있는 내재적 가치, 또 사실상 수도권에 대한 지형학적 이점을 살리려면 아직도 춘천이 가야할 미래는 멉니다. 그런 면에서 아까 얘기한 대로 춘천의 어떤 기초를 새로이 다지고 교육을 세운다든지 해서, 춘천이라는 도시를 전국 최고의 도시로, 유럽이 필요 없습니다. 춘천에서 모든 것이 충족되는 그런 도시를 만들고 싶고요. 그런 측면에서는 시민들께서도 저 육동한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셔서 저의 어떤 열정, 저의 소명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욕심을 전해드립니다. 또 제 스스로 좀 겸허하고 또 낮은 자세로 많이 고민을 하고 춘천 시민들하고 같이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서정암> 오늘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육동한 이사장이 추천하는 한 곡 같이 들으려고 합니다.
 
◆육동한> 요새 제가 이제 홀로 걷거나 할 때 자주 듣는 노래입니다. 마음이 정돈도 되고 노래 자체가 주는 어떤 웅장하고 중후함에 제가 매료됩니다. 요새 굉장히 유명한 이탈리아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의 'Lord's Prayer' 주기도문 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면 청해볼까 합니다.
 
◇서정암> 안드레아 보첼리의 'Lord's Prayer' 함께 들으면서 인사 나누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육동한 이사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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