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한국 정치의 전임자 지우기

스마트이미지 제공
정권 교체기를 청와대에서 보냈던 정부 부처의 고위 공직자에게 들은 얘기다.
 
"당선자의 인수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청와대의 모든 인력이 교체됐다. 행정관은 물론 청소원까지"
 
이 얘기를 들으면서 무척 놀라기도 했고,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려는 지나친 노력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몹시 궁금했다. 전임자에 대한 증오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과감한 선택인지.
 
그런데 그렇게 청와대를 내줬던 전임 대통령은 가혹한 수사와 탄압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의 정황만 놓고 보면 청와대의 모든 인력을 교체한 배경에는 단순히 정치적 이유만이 아닌 감정이 섞여 있었던 것이 분명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세훈 서울 시장도 비슷한 논란에 휩싸였다. 44조원이 넘는 역대 최대 예산을 편성하면서 민간 위탁·보조금 사업의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삭감 폭도 전체 예산의 거의 절반에 이른다. 해당 단체들은 아예 내년 사업을 하지 말라는 조치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일 오전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주민자치 관련 예산과 TBS 출연금 등을 대거 삭감한 2022년도 서울시 예산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세훈 시장이 예산을 삭감한 분야는 도시재생, 주민 자치 등 박원순 전 시장이 역점을 기울였던 사업이다. 오 시장은 이 사업들에 대해 감사를 벌였고, 결과를 이달 중에 발표할 예정이다.
 
오 시장은 TBS 교통방송에 대한 예산도 약 123억원 삭감했다. 전체 예산에 1/3에 이르고 1년 제작비 전체에 해당하는 액수다. 예산 삭감 배경에는 여권 편향이 강한 방송 진행자 김어준 씨를 겨냥한 것이라는 의혹이 일고 있다. 오 시장은 김어준 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공공연하게 밝힌 바 있다.
 
편성권을 직접 침해하기는 부담스럽고 예산권을 무기로 언론탄압에 나선 것 아니냐는 비판이 TBS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오 시장은 '재정 독립이 진정한 독립'이라며 예산 삭감의 이유를 내세웠다. 
 
TBS는 지난 2월 재단을 만들어 서울시로부터 독립했지만, 여전히 수입의 70% 가량을 서울시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고, 법적으로 상업 광고가 불가능해 어떻게 재정 독립을 하라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상 '언론장악 시도'라는 의심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TBS사옥. TBS 제공
오세훈 시장은 무상급식 문제로 직을 내놓기 전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면서 디자인 시장을 내세우며 서울 곳곳에 랜드 마크가 될 만한 상징물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반포에 세빛섬을 민간 유치방식으로 만들었고, 동대문 운동장을 헐고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고척동에는 돔 야구장을 건설했다.
 
하지만 세빛섬은 집중호우로 물에 잠기는가 하면, 사업자 특혜 논란에 휩싸여 3년 가까이 방치됐다 가까스로 문을 열었다. 오세훈 시장은 세빛섬의 실패에 대해 박원순 전 시장 때문이라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오 시장의 주장이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난개발이라며 비판받았던 DDP는 디자인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지만, 오 시장 재직 당시 2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으며 '보여주기 위한 서울 만들기'에 집착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임 시장의 정책 방향이 잘못됐다면 현직 시장이 이를 수정하고 변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임 시장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지우려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정책 수정은 성공을 보장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정치는 정권을 뺏기면 목숨을 잃는 '치킨게임'인가. 지금 여야의 대권 경쟁을 보고 있자면 이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전임자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우겠다는 증오의 정치는 결국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했던 불행한 과거를 우리는 체험했다.
 
시장직을 어렵게 되찾은 오세훈 시장이 이런 증오의 정치에서 벗어나 훌륭한 업적은 남기는 시장으로 남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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