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KT의 유무선 통신망이 약 89분간 멈추며 발생한 '통신대란'은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부산의 한 KT 협력사 직원이 네트워크 경로 설정을 위한 작업을 대낮에 하다 명령어 한 줄을 빠뜨리고 입력한 것이 화근이 됐다. 작업 관리자가 별도로 입회하지 않는 등 KT도 관리 감독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특히 약관상 손해배상 기준이 3시간으로 명시돼 이번 사태가 법적 '배상'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약관 개정 논의도 힘을 받고 있다.
'exit' 명령어 한 줄이 불러온 대란…안전장치 '없었다'
2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의 발표에 따르면 KT의 네트워크 장애는 KT 측의 관리 소홀과 협력 업체의 안이한 업무처리 방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인재(人災)로 드러났다.
이번 사건은 KT 부산국사에서 기업망 라우터 교체 작업을 벌이던 중 발생했다. 애초 KT 네트워크 관제센터는 이용량이 적은 야간시간대(오전 01시~06시)에 작업을 승인했지만, 실제로는 대낮에 작업을 벌인 것으로 파악됐다. 심지어 작업도 네트워크가 연결된 상태에서 이뤄졌다.
시발점은 한 줄의 명령 누락이었다. 작업 관리자 없이 KT 협력 업체 직원들인 작업자들끼리만 라우팅 작업을 벌이던 중 'exit' 명령어를 빼먹은 것이다. BGP(Border Gateway Protocol)에서 교환해야 할 경로 정보가 IS-IS 프로토콜로 전송됐고, 라우팅 경로에 오류가 발생했다는 설명이다.
라우터는 최신 경로정보를 라우터끼리 교환하기 위해 프로토콜을 사용하는데, KT와 외부 네트워크 경로 구성에는 BGP를 사용하고, KT 내부 경로 구성에는 IS-IS 프로토콜을 쓴다. 통상 1만 건 내외 정보를 교환하는 IS-IS 프로토콜에 그 수십만배 규모인 BGP 정보가 엉뚱하게 전송된 셈이다.
오류가 발생했더라도 안전장치가 있었더라면 사고를 예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장치가 미비했다. IS-IS 프로토콜 내의 라우터들은 상호 간의 정보 최신화를 위해 자동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다. 부산 지역 라우터에 잘못된 라우팅 경로가 설정된 이후, 다른 지역의 IS-IS 라우터 등에도 그대로 잘못된 업데이트 정보가 전달됐다. 부산에서 곧바로 서울로, 다시 전국으로 오류가 전파되는 데 걸린 시간은 30초 이내였다.
과기정통부는 "명령어 누락을 스크립트 작성 과정 및 사전 검증 과정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며 "네트워크가 차단된 가상 상태에서 오류 여부를 사전에 발견하기 위한 가상 테스트베드도 없었다"고 분석했다.
19년 전 만들어진 손해배상 기준…"비대면·온라인 시대 안 맞아"
KT의 이번 통신대란은 손해배상 기준으로 논란이 번지는 모양새다.
업계와 정부 등에 따르면 현재 KT를 비롯한 통신 3사의 손해배상 기준은 동일하다. 이동전화와 초고속인터넷 약관의 경우 연속 3시간 이상 또는 1개월 누적 6시간 이상 서비스가 중단될 때 손해배상을 하게끔 돼 있다. 서비스를 받지 못한 시간에 해당하는 월정액(기본료)과 부가 사용료의 8배에 상당한 금액이 최저기준으로 책정된다.
문제는 보상 시간을 3시간으로 규정한 현재의 약관은 사실상 19년 전에 틀이 마련됐다는 점이다. 음성통화 시대에 마련된 기준인 만큼 비대면·온라인 시대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초연결·초지연성을 특성으로하는 5G 시대에 돌입한 만큼, 잠깐의 '먹통'이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초고속인터넷의 경우 2002년 정보통신부가 초고속인터넷 품질보장제를 도입하면서 기준을 4시간에서 3시간으로 강화했고, 이동통신은 2001년 당시 통신위원회 의결에 따라 6시간 기준을 3시간으로 변경했다.
KT 아현국사 화재 이후인 2019년 10월 약관 개정이 있었지만, 손해배상 금액을 기본요금과 부가 사용료의 6배에서 8배로 상향했을 뿐이다. 피해 보상 기준은 연속 3시간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할 경우로 유지했다.
약관개정 논의 힘 받을까…과기정통부·방통위 "검토 중"
실제로 KT 네트워크 장애는 지난 25일 오전 11시 16분부터 89분 동안 이어졌다. 그간 점심 장사를 하는 음식점주, 인터넷 차단으로 인한 업무 자료 손실, 온라인 비대면 수업 및 시험 관련 피해, 주식시장 이용 불가, 병원 보험 결제와 약국 처방전 처리 등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
원칙대로라면 배상 의무가 없지만, KT가 "내부 이사회 검토를 거쳐 약관 범위를 뛰어넘는 보상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힌 이유도 같다. KT 가입자는 이동통신 1750만명, 초고속인터넷 940만명, 시내전화 1002만명, 인터넷전화 317만명, IPTV 900만명 등 중복 가입을 포함해 4900만명에 달한다.
이같은 분위기를 인식해 정치권에서도 약관 개정 현실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여당 간사인 조승래 의원은 지난 28일 KT 혜화타워 방문 직후 "기존 약관은 음성통신 시대의 보상으로, 데이터 시대에 맞는 약관으로 변경하는 것에 대해 정부와 함께 고민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변재일 의원은 보도자료를 내고 "약관상 손해배상 기준시간을 현행 3시간에서 1시간으로 축소하여 장애 발생 시 가입자의 신청 없이도 자동으로 다음 달에 요금을 감면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며 "영업상 손실 등 간접적 손해배상 관련 보상 절차도 약관에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련 부처인 과기정통부와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도 검토에 나섰다. 과기정통부 홍진배 네트워크정책국장은 지난 26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약관상 3시간 기준을 상향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KT뿐 아니라 다른 사업자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라,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방통위 이소라 이용자보호과장은 전날 브리핑에서 "현시점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방안은 없지만 여러 가지 이해관계자들 그리고 전문가 의견수렴을 거쳐서 적절한 개선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핵심 당사자인 KT 구현모 대표 역시 "약관상 3시간이라는 기준이 마련된 지 오래됐다"라며 "통신 의존도가 높아진 비대면 시대에 좀 더 개선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한편 KT의 자체 보상안은 이르면 다음주 초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KT는 전날 오전 8시부터 2시간 동안 긴급 이사회를 열어 이번 장애에 대한 피해 보상안을 의결했다. 통신 장애가 점심시간에 발생해 소상공인 피해가 컸던 만큼, 일괄 보상안과 별도로 소상공인을 위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