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종전선언을 둘러싼 한미 간 협의에 돌연 이상기류가 감지됐다. 미국 고위 관료들이 한국과 미묘한 온도차를 보이는 발언을 내놓고 있어서다. 이는 문안 조율 수준까지 협의가 무르익었다는 지난 주 상황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지난 며칠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설리번 보좌관 "종전선언 조건 등에 다른 관점"…한미 시각차 노출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6일 "(종전선언의) 각 단계에 대한 정확한 순서나 시점, 조건에 대해 (한미 간에) 다소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오직 외교를 통해서만 효과적인 진전이 가능하고 외교는 억지력과 병행돼야 한다는 전략과 신념에는 근본적 입장이 같다"고 덧붙였다.
설리번 보좌관의 발언은 '완전히 조율된 대북전략'을 표방해온 한미 정부가 시각차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첫 사례이다. 종전선언의 시점이나 조건을 놓고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 정부의 '비핵화 협상 입구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돌려 말한 것이다. 종전선언의 상징적 의미와 협상의 촉매 역할에 무게를 두는 한국과는 근본적 차이마저 느껴진다.
지난 주 워싱턴 회동 낙관 기류와 반전…기대했던 성김 방한은 빈손
미국 측 기류 변화는 이미 24일 성김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의 방한 때 관측됐다. 그는 "종전선언 제안을 포함해 다양한 아이디어와 이니셔티브를 모색해나가기 위해 계속해서 협력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지난 18일 워싱턴 회동의 낙관적 기류의 연장선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진전된 결과가 나올 것이란 예상을 빗나갔다.
당시 우리 정부 고위 당국자는 성김 대표의 방한에 대해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 정부 내의 논의 결과를 가지고 우리 측과 다시 협의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양측이 이미 종전선언의 문안을 조율 중인 단계라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마치 급제동이 걸린 듯한 상황 반전의 이유가 더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문안 조율설 자체가 낭설, 일종의 해프닝…美측이 항의하기도"
때문에 일각에선 한미 간 협의가 급물살을 탔다는 관측 자체가 낭설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완성 단계로서 (종전선언) 문안을 조율한 게 아니라 한국 측이 일방적으로 보여준 것을 미국이 고치는 식이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안 조율 중이라는) 기사가 난 것에 대해 미국 측의 항의가 있었다고도 들었다"면서 "일종의 해프닝"이라고 했다.
다수 전문가들도 미국이 종전선언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란 점에 별 이견이 없다. 주한미군과 유엔사의 법적 근거가 흔들리고 대북제재가 느슨해질 수 있는 등 대중·동북아 전략이 타격을 받을 수 있어서다. 한 전문가는 "미국도 종전선언 자체를 반대하진 않지만 어느 범주까지 수용하느냐에 따라 (한국과) 입장이 갈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에선 "미국 입장 충분히 고려해서 작성, 그 정도면 수용할 것"
반면, 미국의 표면적 입장과 달리 한미 간 공감대와 논의가 이미 상당 수준 이뤄졌다는 정반대의 분석도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종전선언 문안과 관련해 여전히 차이는 있지만 상당 부분 조율은 된 것으로 안다"면서 "설리번의 얘기는 한미 간 완전히 조율되고 통합된 문안은 아직 도출이 안 됐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외교정책이 국내 정치를 고려하며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점도 일견 신중한 태도로 비춰지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미 협의에 정통한 소식통은 "종전선언이 주한미군·유엔사 문제가 있어서 미국에 굉장히 어려운 제안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이 그것을 모를 리 없고 미국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서 무난히 만들어졌기 때문에 미국도 이 정도면 뭐…(수용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미국이 반대할 명분 약해…'판문점 선언' 지지는 종전선언 수용한 격
사실 종전선언은 이를 처음 제기한 쪽이 미국이라는 점과 합리적 타당성 면에서 볼 때 미국이 반대할 명분이 별로 없다. 종전선언은 2006년 11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거론했다. 물론 미국은 종전선언을 평화협정의 의미로 인식하고 선(先)비핵화를 조건으로 달았다. 하지만 이조차 트럼프, 바이든 정부에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구분한 판문점 선언의 재확인 또는 존중 의사를 밝히면서 한국 입장을 수용한 셈이 됐다.
실제로 미국은 2018년 북미 싱가포르 회담 때 종전선언 초안(six p.m. text)을 만든 사실이 당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을 통해 밝혀졌다. 여기에는 2019년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 어느 회의 참석자가 "종전선언이 법적 구속력(binding legal effect)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길 원한다"고 말하는 대목도 나온다. 이는 미국이 적어도 3~4년 전 시점에는 종전선언의 의미를 명확히 인식했고, 따라서 이후 법적 검토를 할 시간도 충분했음을 뜻한다.
"2차대전 끝났지만 독일 등에 미군 주둔"…주한미군 철수는 기우
더그 밴도우 미국 카토재단 선임연구원은 25일 내셔널 인터레스트(NI) 기고문에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일본 등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다"며 미국의 태도를 꼬집었다. 필요하다면 협정마저 파기하는 미국이 유독 한반도 종전선언 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소리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