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1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과 한미 간 현안과 대북정책을 폭넓게 협의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이 자리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이 없다는 '진정성'과 함께 북한과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만나 협상을 하겠다는 의사를 재확인했다.
한미 안보실장 협의서 美 "적대시 정책 없다"…기존 입장 재확인
이는 미국의 기존 입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북한이 최근 모종의 대미 메시지를 쏟아내는 가운데 조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책사인 설리번 보좌관이 보인 반응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실린다.북한은 문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 필요성을 언급한 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담화를 시작으로 유화 제스처로 돌아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중기준'과 '적대시 정책' 철회를 종전선언의 선결 중대과제로 전제하면서도 남북통신연락선을 복원하며 한결 누그러든 태도를 보였다.
무기 박람회 격인 지난 11일 국방발전전람회에선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나 미국 특정한 그 어느 국가나 세력이 아니다"는 말도 했다.
이는 북한이 지난해 6월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대남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하고, 올해 1월 노동당 8차대회에서 미국을 '최대의 주적'으로 규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가히 급변에 가깝다.
北 "주적은 전쟁 그 자체" 달라진 언술, 유화 제스처…선남후미 구사
물론 북한은 다수 전문가들의 분석처럼, 남한을 지렛대 삼아 미국을 움직이는 '선남후미'라는 구태의연한 전술을 다시 구사하는 것으로 보인다.김정은 위원장은 "새 미 행정부 출현 이후 지난 8개월간의 행적이 명백히 보여준 바와 같이 우리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위협과 적대시 정책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으며 오히려 그 표현 형태와 수법은 더욱 교활해지고 있다"(9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고 했다.
그는 10여일 뒤 국방발전전람회에서도 "미국은 최근 들어 우리 국가에 적대적이지 않다는 신호를 빈번히 발신하고 있지만 적대적이지 않다고 믿을 수 있는 행동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며 날선 경계심을 나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는 완화된 기조 속에 미국과의 대화 의지를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당 창건 기념일에 즈음한 대규모 열병식이나 무력시위 대신 무기박람회로 톤을 낮춘 것이나, 미국이 "적대적이지 않다고 믿을 수 있는 행동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는 항변은 역설적으로 대미 협상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美 '진정성' 언급 불구, 北 원하는 '행동적 근거' 없어…간극 여전
하지만 북한의 미묘한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북미 간 간극은 여전히 크다.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만나 미국의 '진정성'을 언급했지만 이는 북한이 원하는 '행동적 근거'가 될 수 없다.미국은 북한이 일단 대화 테이블에 나오면 모든 사안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하노이 노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북한으로선 최소한의 담보물이 필요한 상태다.
이번 한미 안보실장 협의에선 김정은 위원장의 '주적' 등 대미 메시지와 관련해 초보적 논의가 있었을 뿐 구체적 협의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관심을 끄는 종전선언 문제도 정부 고위 당국자는 "우리측 입장에 대한 미국의 이해가 깊어졌다"고 했지만 미국 측 보도자료에는 종전선언 언급이 없었다.
이처럼 북미 간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14일 러시아에서 한러 북핵수석협의를 갖는 등 다각도 접근을 벌이고 있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북한은 자위권 차원의 무기 개발을 지속하며 '강대강 선대선'의 정면돌파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미의 막강한 국력에 맞서 경제와 국방을 동시 발전시키는 것은 북한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북한은 주적이 남한과 미국이 아닌 전쟁임을 천명했고, 미국도 대북 적대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서로가 '말 대 말'을 뛰어넘어 '행동 대 행동'으로 발전되어야 하며 그 출발선은 의미 있는 남북대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