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해 음주운전을 하고도 "내가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고 주장한 전직 소방관은 승용차 '후면 블랙박스'로 덜미를 잡혔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A(47)는 새해 벽두인 지난 1월 1일 오후 3시 37분께 술에 취해 조수석에 친구 B(47)씨를 태우고 차를 몰았다.
14㎞를 달려 도착한 식당.
이곳에서 A씨는 친구와 술을 나눠 마시고 오후 5시께 다시 승용차에 올랐다.
하루에 2차례나 음주운전을 한 것이다.
거나하게 취한 A씨는 다시 친구를 채우고 운전대를 잡았다가 승용차 운행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주민의 신고로 경찰에 적발됐다.
이날 하루 A씨와 B씨는 나란히 술을 마시고 번갈아 운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혈중알코올농도를 역추산하는 위드마크(Widmark) 공식을 적용한 결과, 첫 번째 음주운전 농도는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0.041%, 두 번째 음주운전 농도는 면허 취소에 해당하는 0.170%였다.
재판에 넘겨진 A씨는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1심에서 벌금 2천만원을 선고받고 해임되자 진술을 모두 바꿔 항소했다.
항소 요지는 식당에서 나온 이후, 두 번째 음주운전에서 자신이 아닌 친구가 운전대를 잡았다는 것.
항소심을 맡은 전주지법 제3형사부(고상교 부장판사)는 A씨 주장을 토대로 차량 블랙박스를 면밀히 살폈다.
차량 전면 블랙박스를 보면 두 번째 음주운전 적발 직전인 오후 4시 37~39분, 조수석에 탑승하고 있던 A씨가 운전석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A씨가 운전석에 올랐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문 닫힘 충격'이 블랙박스에 감지되지 않았다.
이미 운전석에는 친구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A씨는 자신이 아닌 친구의 운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면 블랙박스가 아닌 후면 블랙박스가 이 사건의 증거로 작용했다.
A씨가 운전석 방향으로 이동한 이후 친구는 A씨를 태우지 않고 그대로 출발했다.
출발 이후 몇 초 만에 차가 멈추고, 후면 블랙박스에 A씨가 운전석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혔다.
재판부는 이 시각 친구가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방향으로 이동, 조수석이나 조수석 뒷좌석에 탑승한 것으로 판단했다.
친구가 승용차 앞을 거쳐 조수석 방향으로 이동한 장면이 전면 블랙박스에 찍혔고 후면 블랙박스에서는 친구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차량은 그대로 출발했다.
A씨는 후면 블랙박스에 찍힌 남성을 '제3의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동시에 친구가 차량 뒤쪽을 돌아 다시 운전석에 탑승했지만, 후면 블랙박스 화질이 흐려 찍히지 않았다는 등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 부장판사는 "후면 블랙박스의 화질이나 차량 뒷면 유리의 혼탁 상태를 고려하더라도 사람이 지나갔다면 식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피고인의 친구가 상체를 숙여 차량 뒤쪽으로 돌아갔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당초 이 사건은 전면 블랙박스 영상만으로 심리를 이어왔으나 제3형사부 좌배석 김현지 판사가 후면 블랙박스 영상을 찾아내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이에 따라 전주지법 제3형사부는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의 항소를 기각, 벌금 2천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