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헤치자 이름이 나타났다. 4년 전 아빠의 폭행에 짧은 생을 마감한 A군(당시 1세)이다.
A군의 '마지막'은 더 비참했다. 부모가 가해자로 처벌을 받으면서 아이의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영안실에 머물다 곧바로 화장될 운명이었다. A군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들이 나서기 전까지.
A군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형사들이 상주를 맡았고, 시흥시와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장례 절차를 지원했다.
시흥경찰서 최승우 강력계장은 "불쌍하게 꽃도 피우지 못하고 생명이 짓밟혔는데 누구도 마지막 배웅을 신경 쓰지 않았다"며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싶어 장례를 치러줬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버림받고 잊혀진 학대아동
지난 3월 인천시 중구의 한 빌라에서 부모의 학대로 숨진 여덟 살 초등학생 B양은 빈소조차 차려지지 않았다.엄마와 동거남은 구속됐고, 경찰이 B양의 친아버지에게도 연락했지만 끝내 딸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결국 후견인의 뜻에 따라 장례식도 없이 화장됐다.
후에 지역 학부모들이 나서 추모공간을 마련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가족들로부터 무참히 버림받은 B양의 넋을 기릴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해자에 맡겨진 '학대아동 장례'…정책의 부재
22일 보건복지부의 '2020 아동학대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아동학대는 3만 905건 발생했고, 이 중 사망한 어린이는 모두 43명으로 나타났다. 또한 가해자가 부모인 경우는 2만 5380건으로 전체의 82.1%를 차지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아동학대 사망사건 가해자가 구속 상태에 있는 부모이기 때문에 아이 사망 시 추모의식이 생략되기 일쑤다.
또한 장례 여부는 후견인인 친족들에게 맡겨지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학대사건이 알려지길 꺼려하면서 제대로 된 장례 절차를 밟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양부모의 학대와 방임으로 두 달여간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 사망한 '민영이' 역시 추모의식 없이 화장될 뻔 했다가 언론 보도를 통해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면서 시민단체 등의 권유로 짧게나마 빈소가 차려졌다.
A군처럼 상황에 따라 지자체와 범죄피해자지원센터 등이 장례를 지원하고는 있지만, 친권자나 후견인이 직접 신청을 해야 해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동학대 예방과 피해아동 보호을 위해 '모두 국가가 관리해야 된다'는 결정문을 정부에 권고했지만, 여기에도 장례지원 관련 사안은 담기지 않았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아동학대 방지와 회복 위주의 지원에 집중해 왔다"며 "지자체별 판단에 따라 장례를 지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국가 차원의 지원 방안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존엄·경각심 위한 국가 역할…추모시설 건립도"
전문가들은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학대아동들의 죽음에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유족의 신청에 따라 지원하는 이른바 '신청주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필수지원'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비용은 가해자인 부모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공혜정 대표는 "피해아동의 마지막 존엄이라도 지켜줘야 하는데 학대행위자인 부모는 구속, 재판을 핑계로 이를 간과한다"며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사망한 아이에 대한 추모의식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공 대표는 "경제력이 천차만별인 만큼 형평성을 위해 모든 학대피해 아동들에 대해 장례를 국가에서 치러주고 사후에 가해자에게 비용을 청구해야 된다"고 조언했다.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이배근 회장은 "여태 학대아동 사망 이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다"며 "가해자인 부모의 친권은 즉시 중단시키고 지자체장 등이 주관해 장례를 의무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법제도를 정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또 "장지가 방치되는 사례가 많은 만큼 제대로 된 장묘관리의 필요성과 아동학대의 심각성을 감안해서라도 합동추모공원 조성 등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