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폭력의 역사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지만,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역사 역시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나올 것임을 의미한다. 영화 '캔디맨'은 조던 필이라는 이름이 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작금의 폭력적인 차별을 향해 강렬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거울을 바라보고 '캔디맨'을 다섯 번 부르면 그가 나타난다. 죽음을 부르는 남자, 세상을 뒤흔든 미지의 존재, 시카고 카브리니 그린의 도시 괴담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존재 캔디맨.
비주얼 아티스트 안소니(야히아 압둘 마틴 2세)는 새 작품 구상을 위해 어릴 적 살던 도시인 카브리니 그린으로 돌아온다. 예술의 영감을 찾고 있던 안소니는 우연히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캔디맨 도시 괴담을 듣고 된 후, 거울을 보고 이름을 다섯 번 부르면 나타난다는 미지의 존재에 매료되고 만다.
캔디맨을 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안소니는 결국 그 이름을 다섯 번 부르게 되고, 이후 2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안소니에게 점점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소니는 캔디맨에 대한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된다.
호러 영화 속 살인마인 캔디맨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되, 조던 필 감독과 니아 다코스타 감독이 새롭게 만들어 낸 '캔디맨'은 흑인 주인공을 중심에 두고 이른바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한다. 공포 장르를 통해 인권에 관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영화는 흑인을 향한 차별과 배제, 폭력의 역사에 대한 과거부터 현재의 이야기들을 비춘다. 이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예술가인 안소니를 향한 은근한 차별과 상품화, 흑인 거주지의 낙후화와 재개발 등의 문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안소니가 캔디맨에 빠져든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캔디맨의 역사와 닮아있다. 특히 영화 초반과 영화 후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캔디맨의 죽음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꼭 들어맞는다. 이는 캔디맨이 탄생하게 된 역사와 이어진다.
'캔디맨'이 공포 영화이자 슬래셔 무비의 성격을 지닌 영화라는 점에서 극 중 흑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적인 언행을 가했던 백인들이 캔디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캔디맨이 가진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차별과 폭력의 역사에 대한 단죄의 성격을 갖는다. 죽임을 당한 백인들은 단순히 백인이라는 인종이 아닌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을 은유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캔디맨이 저지른 살인들은 차별주의자들의 폭압과 폭력에 대한 저항을 호러적 수사로 표현한 것이다.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차별주의로 인한 폭력의 희생자, 피해자로만 남지 않고 적극적으로 저항함으로써 살아남겠다는 목소리를 호러적인 수사를 통해 말한다. 바로 이것이 호러 장르가 가진 역할이다.
그리고 캔디맨이 모습을 바꾸며 시대를 달리해 나타나는 것은 결국 흑인 비극의 역사를 외면하는 한, 다시 말해 인종 차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언제 어디서든 캔디맨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공포 영화가 사회를 비추며 이를 다양한 공포적 수사로 표현해 내는 장르라면, '캔디맨'은 공포 영화가 가진 역할은 물론 장르적 재미까지 모두 갖춘 영화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적인 지점을 조던 필과 니아 다코스타 두 감독은 우울하면서도 피투성이의 미장센을 바탕으로 한 충격적인 공포로 전환해 풀어냈다. 그렇게 영화는 엔딩크레딧이 끝나는 순간까지 캔디맨과 그의 메시지를 잊지 말라고 말한다.
공포 영화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고 비판하며 목소리를 낸 조던 필 감독의 역량을 다시 한번 목격했고, 니아 다코스타 감독이 보여줄 또 다른 세계가 기대되는 영화다.
여기에 점점 알 수 없는 광기에 젖어 들며 역사이자 현재의 비극을 온몸으로 담아낸 야히아 압둘 마틴 2세의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연기는 확실하게 관객을 사로잡는다.
91분 상영, 9월 22일 개봉,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