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마블이 새롭게 여는 시대에서 이전 세대의 유산을 물려받는 새로운 히어로들이 어떤 모습일지 많은 영화 팬이 궁금해 했을 것이다. 마블 페이즈 4의 시작을 알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전성기 시절 홍콩 영화 추억을 소환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는 영웅의 시작을 알린다.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텐 링즈'의 힘으로 수 세기 동안 어둠의 세상을 지배해 온 아버지 웬우(양조위)의 밑에서 샹치(시무 리우)는 암살자로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어둠의 세계에서 살길 거부한 샹치는 아버지 곁을 떠나 미국에서 평범한 삶을 선택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샹치는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습격으로 더 이상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친구 케이티(아콰피나)와 함께 어머니가 남긴 가족의 비밀과 내면의 신비한 힘을 일깨운다. 그 과정에서 샹치는 벗어나고 싶은 과거이자, 그 누구보다 두려운 아버지 웬우를 마주하게 된다.
마블이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세대에게 배턴을 넘기는 마블 페이즈 4의 시작을 아시안 히어로 샹치가 열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감독 데스틴 다니엘 크리튼)은 모든 영웅 서사가 그러하듯 거듭된 고난에 놓이는 주인공이 아버지의 존재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최종 과제를 수행한다.
어린 시절 샹치를 억압하고 그에게 공포와 트라우마를 안긴 존재는 가장 가까운 관계라 할 수 있는 아버지 웬우다. 그간 마블 히어로들 역시 트라우마 속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보였는데, 샹치는 첫 번째 시리즈에서부터 아버지를 뛰어넘고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이는 빌런이자 극복해야 할 존재인 아버지를 배척하거나 자기 파괴적인 방식이 아니다. 어머니 장 리(진법랍)의 가르침에 따라 아버지를 마주하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흔적을 인정하는 방식을 취하는 까닭이다.
사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 중 하나는 이전 마블 히어로 무비와 다른 결을 가진 점이다.
우선 할리우드 히어로 무비에서 팝 음악 비트에 맞춰 홍콩 액션 영화처럼 무술을 이용한 액션을 선보이는 히어로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색다른 느낌이다. 마치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홍콩 액션 영화에 대한 오마주처럼, 액션 시퀀스에서 익숙한 기운을 풍긴다.
기본적으로 맨몸 액션을 바탕에 두되, 무협영화에서 봐 왔던 유려하고 환상적인 무술 역시 등장한다. 샌프란시스코 도심 속 버스 액션 시퀀스, 마카오 액션 시퀀스의 경우 홍콩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지형지물을 이용한 액션이다. 이는 과거 홍콩 영화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샹치와 웬우의 서로 다른 캐릭터만큼, 둘의 의상 스타일이나 둘이 머무르는 장소의 색과 분위기, 액션 스타일 역시 모두 대조적으로 세팅했다. 샹치가 밝고 보다 경쾌한 스타일의 액션을 추구한다면, 빌런이자 아버지인 웬우는 어둡고 묵직한 느낌의 액션을 선보인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아시안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큼, 중국 문화에 대한 서양인의 판타지가 마블 히어로 무비와 엮인 느낌을 영화 전반에서 만날 수 있다.
어머니 장리의 고향이자 이모 장난(양자경)이 살고 있는 탈로 자체도 신비로운 기운이 가득하다. 또한 탈로에는 고대 중국 지리서 '산해경'을 비롯한 중국 신화와 설화 속에서 등장하던 신수와 상상 속 동물인 해태, 구미호, 제강, 용 등이 대거 등장한다. 서양에서는 주로 악한 존재로 비춰지는, 드래곤이라 불리는 용과 달리 동양에서는 신수로 여겨지는 용이 등장해 샹치와 함께 악한 존재들로부터 세계를 구해낸다.
중국 문화 요소는 악당 데스 딜러(앤디 르)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경극 가면을 쓴 데스 딜러는 경극 음악을 기본으로 한 배경음악을 바탕으로 등장한다. 이 외에도 중국 전통 무술과 전통 복장 등 동양적인 요소들이 많이 녹아 있다.
가장 중요한 동양적 요소라고 한다면 동양인이자 이민자인 샹치와 친구 케이티다. 그들이 영웅으로 거듭나는 장면이 현실 세계에 만연한 동양인 차별 시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이는 것은 양조위와 양자경이다. 양조위는 그간 다른 영화에서 보여 온,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고 애처롭고 애틋한 캐릭터로서 다시 한번 자신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예스 마담' 시리즈와 '동방삼협' '와호장룡' 등에서 절도와 품격 있는 액션을 선보였던 양자경은 이번 영화에서도 액션 배우다운 면모를 드러낸다.
존재감 강한 데다 그동안 쌓아 올린 이미지가 영화 속 캐릭터와 맞아떨어지면서 스크린을 장악한 양조위의 웬우. 그가 시무 리우의 샹치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을 구할 히어로의 각성과 영웅으로서의 존재감보다는, 아버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이야기가 중심에 있는 영향도 있어 보인다.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에서부터 영웅의 길이 시작된다고 본다면, 이번 영화는 향후 시리즈를 위한 건강한 히어로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132분 상영, 9월 1일 개봉, 쿠키 2개 있음,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