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EA 분석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영변 핵시설에서 7월 초부터 원자로 가동 정황이 있었고 그에 앞서 2월 중순부터 폐연료봉 재처리 시설의 가동 정황도 있다는 대목이다. 이는 미국의 의중을 더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미국이 알면서도 짐짓 모른 채 해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긴밀한 한미공조 하에 북한 핵미사일 활동을 지속 감시 중"이라고 했다. 한미 양국이 IAEA의 분석 내용과 동일하게, 또는 더 상세하고 더 빨리 파악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 정부가 영변 상황을 알면서도 남북 통신선 복원에 응했다는 비판이 일지만 현 교착 국면에선 부차적 문제이다. 그보다는 미국이 북핵 동향을 손금 들여다보듯 하면서도 침묵했던 이유가 더 본질적이다. 북미·남북관계를 직시하고 풀어가는 차원에서 그렇다.
北 영변카드에 美 무시전략…'조건 없는 대화'에 北은 진정성 의심
그렇다면 미국의 속내는 '전략적 무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물론 바이든 행정부는 대북 강경책으로 전환할 것이란 초기 우려와 달리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를 거듭 촉구하고 있다. 북한이 일단 대화에 응하면 모든 관심사를 진지하게 협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서 조건 없는 대화는 사전 기 싸움에서의 패배를 의미한다.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등 이른바 '주동적 조치'로 이미 상당한 양보를 했음에도 '하노이 노딜'의 수모를 겪었다고 인식한다. 그 반대급부로 내세운 것이 적대시 정책 철회다. 그래야만 협상을 재개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무조건 대화 복귀를 요구하는 미국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최고 존엄이 또다시 하노이의 굴욕을 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전까지는 대화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최근 북한에 대한 여행금지 조치를 연장했고 테러지원국 해제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어떤 신호로 받아들일지는 명약관화하다.
바이든 대북정책 모순적 측면…남북 협력하되 대북제재 철저 이행
싱가포르 선언 존중과 한미연합훈련 고수도 상충되는 태도다. 물론 한미훈련 중단은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이고 즉흥적 결정이다. 하지만 한미훈련을 성역시하는 것은 싱가포르 선언의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및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영변 핵시설 재가동에 대한 '전략적 무시'도 국제사회의 보편적 기류와 거리가 있다. 미국은 '같은 말(馬)을 두 번 사지 않는다'는 방침 하에 영변의 가치를 평가 절하해왔다. 하노이 회담 때 북한의 제안을 일축한 배경이다.
하지만 지난 7월 영국과 러시아 연구소는 영변 핵시설이 폐기됐다면 북한 핵무기 생산 역량이 최대 80%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변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대화·외교의 긴급한 필요성'이 동시에 제기되는 이율배반적 상황이다.
아프간 후폭풍에 北 우선순위 더 후퇴?…유동적 상황에 전망 엇갈려
결국 '말 따로 행동 따로'가 될 공산이 큰 바이든 대북정책은 아프가니스탄 철군 영향으로 더 후퇴할 우려가 커졌다. 이와 관련, 최근 미국을 방문한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미국이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도 북핵문제를 선결과제로 다뤄 나가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프간 사태의 후폭풍이 예상보다 커진 만큼 북핵문제의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바이든 대북정책: 동맹의 변화와 비핵화 목표의 후퇴'에서 아프간 사태와 상관없이 북한은 더 이상 미국의 외교안보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은 바이든의 대북정책을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2.0 버전'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상황이 매우 유동적인 만큼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아프간 철군은 중국 견제를 위한 전열 재정비 목적인 만큼 잘 마무리된다면 초점을 동아시아로 좁히는 효과가 있다. 형혁규 국회입법조사처 외교안보팀장은 "미국의 외교안보전략이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한 걸음 더 이동함에 따라 2019년 북미정상회담 이후 지지부진한 북미관계에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