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안기부(現 국정원의 전신)의 사고조사 결과를 보면 ''칼 858기''는 이라크를 출발해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부다비에 잠시 내린 뒤 다시 다음 기착지인 방콕으로 비행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칼 858기''는 29일 오후 2시쯤 미얀마 벵골만 상공에서 무선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탑승객은 중동의 기적을 일궈내고 귀국하던 한국인 해외근로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한국승객 93명과 외국승객 2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안기부는 ''사고''의 성격과 관련해 "사건발생 15일 만인 12월 13일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공기주입펌프 등이 파손된 칼기 구명보트 등 부유물 7점이 발견됐다"며 "이에 따라 비행 중 폭발에 의한 추락사고"라고 발표했다.
이어 안기부는 "''칼 858기''는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북한 대남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고 기내에 두고 내린 시한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폭발물''의해 폭파됐다"고 덧붙였다.
사건의 진상이 공식 발표되자 미국은 즉각 북한을 테러국가로 규정했으며 일본도 북한공무원의 입국을 금지하는 등의 강경 조치를 취했다.
이후 폭파범으로 지목된 김승일과 김현희는 전격 체포됐으나 김승일은 수사기관의 조사 중 ''음독 자살''해 숨졌고 김현희는 1987년 12월15일 서울로 압송됐다. 김현희의 압송은 대선을 불과 나흘 앞두고 벌어져 숱한 ''억측''들을 쏟아냈다.
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칼 858기 폭파 사건''으로 국내에는 자연스레 공안정국이 형성됐고 이어진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정부가 ''칼 858기 폭파사건'' 수색을 시작한지 10일 만에 조사단을 현지에서 철수시키면서 ''의혹''은 불거지기 시작했다.
예를들어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에 참석한 남쪽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한 소녀가 김현희라고 공개한 사진이 김씨와 다른 인물이라는 의혹이 대표적인 것.
파장이 커져가자 안기부에서 이름을 바꾼 국가정보원은 각종 ''조작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당국이 강력하게 부인하면서도 ''국가 기밀''을 이유로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아 의혹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던중 지난 2006년 8월, 결국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가 ''칼 858기 폭파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지난 87년 11월 미얀마 상공에서 실종된 대한항공기는 당시의 안기부 발표대로 폭탄 테러에 의한 추락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 북한 공작원인 김승일과 김현희가 폭파범이라는 심증을 갖는 데도 무리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는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대선에 이용하기 위해 노력한 점은 분명하며 이와 관련한 정부의 문건과 김현희를 대선 전날까지 압송하려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사실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