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함, 초연함, 발산하지 않는, 절제된.
모두 배우 배두나와 그의 연기를 마주한 비평가들의 공통된 인상이다. 20년 넘게 스크린, 안방극장 등 플랫폼과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배두나에게는 전형성을 탈피한 그만의 얼굴이 존재한다.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배우 배두나 특별전 'SWAGGIN' LIKE 두나'을 마련했다. 기획자인 김현민 프로그래머는 "배두나에게는 언어나 제작 국가, 심지어 캐릭터가 인간인가 비인간인가 하는 것마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계를 가뿐히 넘나들고 희미하게 지우며, 오히려 우리에게 장벽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며 "어떤 층위에 있는 캐릭터를 맡아도 자기화하면서, 인물을 현실 위에 단단히 두발 딛게 만드는 구체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8일 열린 '스타토크-경계를 넘나들다: 배두나 배우특별전 토크'에 참석한 배우 배두나는 김 프로그래머와 함께 자신의 연기 인생과 철학에 관해 이야기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배우 배두나
처음 특별전 슬로건을 보고 의아했던 배두나는 슬로건 안에 담긴 뜻을 알게 된 후 그 안에 자신의 마음가짐이 담긴 것 같다고 말했다.
"저는 제 자신의 행보를 위해 뽐내거나 스웨깅하는 걸 최대한 자제하고, 의식적으로 깨뜨리는 편이에요. 왜냐하면 그게 내 자신에게 굴레가 될까 봐서요. 그리고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걸 막을까 봐 굉장히 좋아하지 않아요. 오히려 무심하다는 것, 그것은 제 자신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전진하게끔 하는 힘이 돼요. 마인드 컨트롤하는 것, 그걸 담고 있는 슬로건인 것 같아서 멋있다고 느꼈어요."
지난 1998년 패션 잡지 모델로 데뷔한 배두나는 드라마 '학교' 시즌1(1999)을 통해 신비로운 매력과 개성 넘치는 연기력을 선보이며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 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 '고양이를 부탁해'(2001) '복수는 나의 것'(2002) 등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에서 개성 있는 캐릭터로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이후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로 천만 배우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그의 연기에 감명받은 워쇼스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등 세계적인 거장이 러브콜을 보내며 해외 영화계에 진출해 '공기인형'(2010) '클라우드 아틀라스'(2013) 등에 참여하며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했다.
이후 영화 '도희야'(2014) '터널'(2016) 등은 물론 미국 SF 드라마 '센스 8'(2015), 드라마 '비밀의 숲'(2017) '비밀의 숲 2'(2020),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 시즌1'(2019) '킹덤 시2'(2020) 등 경계 없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오가고 있다.
김 프로그래머는 이처럼 배두나의 연기가 국가, 언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까지 넘나들면서 동시에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경계를 넘나든다고 표현했다.
배두나는 "'공기인형' 속 인형 등의 캐릭터들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마음'을 갖고 있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건 매우 현실적인 캐릭터"라며 "나는 연기를 머리로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직관과 본능에 많이 기대서 가는 편이다. 마음이 있는 캐릭터라면, 마음을 넣어서 연기하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배두나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배우의 길을 걸어왔다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들에 잇따라 이름을 올렸지만, 배두나는 사실 오랜 시간 방황했다고 털어놨다. '복수는 나의 것'의 경우 시나리오가 코믹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적어 충격을 받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플란다스의 개'가 당시에는 흥행도 안 좋았고,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작품은 아니었어요.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도 그렇고요. 제가 정말로 좋다고 생각해서, 시나리오가 정말 좋다고 생각해서 찍는 영화들의 결과가 별로 안 좋았죠. 그래서 사실 굉장히 오랜 시간 방황했어요. 나에겐 재밌는 게 대중에겐 재미없는 것인가, 나는 안목이 없다고 생각했었죠.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관객들이 다시 봐주고, 회자되는 것들이 저에겐 굉장히 큰 위로예요."
배두나가 자신만의 리듬으로 걸어 온 길을 살펴보면 각각의 특색이 도드라지는 작품이 많다. 배두나는 장르의 성격이 강하거나 강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 속 앙상블 안에서도 돋보이거나 발산하려 하기보다는 절제하고 담백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는 "앙상블에서 중요한 건 누가 그 신을 리드하느냐다. 내가 서포트 해야 할 때가 있고 리드해야 할 때가 있다. 이런 건 유연하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개인적으로 모든 신에서 연기를 잘해야 하는 배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앙상블을 위해서 가만히 있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웬만하면 그런 면에서는 튀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배두나의 완급 조절이 돋보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고양이를 부탁해'다. 20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세밀하게 각인한 영화에서 배두나는 착하지만 엉뚱한 태희 역을 맡아 열연했다.
배두나는 "'고양이를 부탁해'는 여러 가지 면이 다 잘 맞아떨어진 거 같다. 캐릭터나 영화를 대하는 태도, 임했던 자세, 감독이 내게 원했던 자세, 시대적 조건 등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며 "요즘에 그렇게 찍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감독들이 본인의 입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어떤 캐릭터를 만든다. 본인을 투영한 캐릭터들이 나한테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도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부름을 많이 받았고, 나도 그런 캐릭터를 좋아한다"며 "아무래도 작품, 특히 캐릭터를 선택할 때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건 이전 작품"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직관적'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역할이 달라진다고 덧붙였다.
'담백함' '초연함'…배우 배두나에게서 발견한 것들
김 프로그래머는 이번 특별전을 위해 관련 작품의 프로그램 노트를 여러 필진에게 부탁했다. 자신이 봤던 배우 배두나를 다른 비평가는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발견한 배두나에 대한 인상은 '담백함, 초연함, 발산하지 않는, 절제된'이었다.
김 프로그래머는 "이런 특성 때문에 배두나의 연기를 볼 때 어떤 장르에서든 안정감을 느낀다. 책임감 있는 사람을 무대에 올려놓으면 보는 사람이 불안하지 않다"며 "그래서 배두나가 가진 분위기 자체가 작품 전체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이에 관해 배두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거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관객들이 제 연기에 호불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그런 지점"이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담백함, 초연함 등 제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보인 것이라 너무나 뿌듯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절제하지 않고 '이런 감정입니다'라고 이야기해도 되고 크게 보여줘도 되는 거죠. 하지만 영화라는 장르는 마음을 먹고 읽어주러 오는 것이기에 조금은 덜어내야 관객들이 캐릭터를 읽기 위해 능동적으로 더 다가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더 몰입하기도 쉬울 거 같고, 캐릭터도 풍부해진다고 봐요."
이처럼 배두나는 자신만의 노선을 정해 자신만의 연기를 선보이며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다. 김 프로그래머는 개인으로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한 주체로서 멋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20년 넘게 한 자리에서 '배우 배두나'로 걸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배두나에게 던져진 마지막 질문에 그는 솔직한 대답을 건넸다.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20년 지났어요. 그러다 보니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뭔가 더 하고 싶은 게 별로 없기도 하고, 그리고 솔직히 제가 생각하기에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한 번 태어나서 여러 번 여러 캐릭터를 살아보는 거잖아요. 이만한 직업은 정말 없어요.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고요. 저는 킥복싱도 해보고, 파이터 역할, 인형 역할 등 여러 번 살아봤죠. 배우는 진짜 좋은 직업이고, 계속할 수 있는 힘도 바로 그거예요. 여러 인생을 살아보고, 내가 마스터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라는 점, 계속 정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항상 해도 해도 마음에 안 드는 것. 그것이 원동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