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에 대형 화분 154개가 등장하면서 배경을 두고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서초구청 측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적용에 따라 '1인 시위' 외에 불법 집회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밝혔지만, 정당한 집회·시위를 막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상태다.
화분 설치 시점은 공교롭게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된 당일로, 시기상으로도 여러 미심쩍은 시각이 일고 있다. 삼성 사옥 인근에서 시위를 진행해왔던 노조 측은 '삼성 배려'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27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서초구청은 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왕복 4차선 도로 약 130m 구간에 대형 화분 154개를 설치했다.
화분은 약 50cm 높이로 앵커볼트로 바닥에 고정됐다. 이 중 나무가 심겨 있는 화분은 2개고 나머지는 비어있거나 쓰레기가 들어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화분 설치 핵심 이유에 대해 구청 측은 '방역'을 들었다. 구청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거리두기 4단계가 종료되는) 9월 5일까지 임시 조치로 화분을 설치했다"며 "집회나 기본권을 제한하려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오래된 집회 물품이 지저분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방역 차원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라고 밝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거리두기 4단계가 다음 달 5일까지 연장됨에 따라 현재 집회 및 시위는 '1인 시위' 외에 모두 금지된 상태다. 혹시 모를 '집회 인원 밀집'을 화분을 통해 막았다는 게 구청의 설명이다.
구청 측은 "(주변 시민들의) 정신적 피해가 있고, 현수막 문구도 과격해 민원이 들어왔다"며 집회와 관련한 잦은 민원이 화분 설치의 배경이 됐다고도 밝혔다. 실제 인근 직장인들은 소음 불편 등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형 화분 설치로 집회를 차단하는 구청의 조치가 적절한지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잇따르고 있다. 국민의 권리이자 헌법에 보장된 집회·시위의 자유를 시민의 혈세를 들여 막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지난 20일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서초구청의 불법 행정을 고발합니다'는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청원인은 "서초구청이 삼성 본관 앞의 정당한 1인 시위자들의 집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며 "해당 도로의 통행과 파손을 조속히 원상복구함은 물론, 불법행정의 재발 방지를 약속하기 바란다"라고 밝혔다.
삼성 서초사옥 일대는 그간 직업병 피해자, 해고 노동자 등 시민·노동단체들의 집회 및 기자회견이 꾸준히 있어왔다. 사옥 앞에서 매주 1인 시위를 이어온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구청의 화분 설치는 집회를 원천 봉쇄하려는 것"이라며 "소음 기준을 넘어가면 경찰이 제재하고 시위자들도 자제하려고 하는데, 구청이 코로나를 핑계 삼아 집회 방해를 위한 화단을 설치한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시민단체 등은 화분 설치 근본 배경에 구청의 '삼성 배려', '눈치보기'를 의심하고 있다. 화분이 설치된 13일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복역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풀려난 날이다. 김 위원장은 "이재용 가석방을 축하하기 위한 공사 밖에 더 되느냐"라고 주장했다.
이에 구청 측은 "오해할 만하다"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우연'이라는 입장이다. 구청 관계자는 "삼성전자 서초사옥 뿐만 아니라 강남역 8번 출구, 방배 재건축 구역, 현대기아 앞 등 장기 집회 현장에도 지난달 16~22일 화단을 설치했다"며 "시위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다른 데를 먼저 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한 것"이라고 밝혔다.
화분 설치를 둘러싼 논란은 현장 갈등과 교통 혼잡으로도 번지는 양상이다. 지난 25일 오전 10시쯤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화분이 설치되지 않은 일부 도로에 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하겠다며 차량을 대자 구청 직원들이 주·정차 위반 딱지를 붙였다. 시민단체 측은 인근에 주차된 삼성 통근버스에는 딱지를 붙이지 않는 구청 측의 조치에 반발하며, 평소 기자회견 및 집회 장소였던 곳에 화분을 설치한 것에 항의했다. 이에 구청 측은 삼성 통근버스에도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화분이 설치되면서 도로 양 끝 단에 공사 가림막이 쳐지는 등 도로폭이 좁아지자 교통 혼잡이 발생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의 기본권인 집회·시위 등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만큼 '신중한 행정'과 고민이 필요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김준희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디자인에 보면 '적대적 건축(hostile architecture)'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 공간을 특정 목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라며 "화단도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집회·시위의 자유나 노숙인이 공공 공간에 머물 권리 등 권리 간의 충돌이 있을 때 누군가는 더 근본적인 기본권을 침해받는다"며 "시민들도 화단이 설치됐을 때 불편할 수 있어, 어떤 권리가 더 보장되는지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광장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시민들의 불편도 최소화하는 '디테일 행정'을 강조했다. 그는 "(시위자들이) 룰을 지키지 않고 선을 넘다 보니까 (구청도) 궁여지책으로 한 것로 보인다"며 "광장을 사용 못 하게 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는 원론적으로 막아야 하지만, 불법·편법 시위로 인해 시민들이 불편하다면 중간선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권영국 변호사(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는 "기본권 제한은 비례의 원칙을 따라야 하므로 거기에 적합한 수단을 써야 하는데, 화분 설치는 마치 모기 한 마리에 푸줏간 칼을 쓰는 것과 같다"며 "집회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한 정부에서 그런 행정을 한다는 것은 자기 말에 형용모순"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