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대통령 한 마디에, 빼앗긴 인생…진실은?

['기모노 특허권' 강탈 사건…그 전말]③
진화위 인권침해 초점, 진상 규명 나서
국가권력 개입 여부와 과정 조사 핵심
번번이 가로막혔던 진실의 길…무너진 삶
고난 속 가족 "진실 밝혀 명예 회복해야"

▶ 글 싣는 순서
①사라진 '기모노' 홀치기 특허권자
②'중정'은 왜 '홀치기 특허권자'를 잡아갔을까
대통령 한 마디에, 빼앗긴 인생…진실은?

정근식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이 지난 5월 제1차 진상규명 조사개시 결정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경식씨는 끝내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지 못한 채 지난 2015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아들 용보(69)씨는 다시 한 번 진실의 끈을 잡았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이하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기모노 특허권 강탈 '진상 규명'…국가권력 조사 초점

26일 진화위는 7차 조사 개시 발표를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자행된 이른바 '기모노 특허권 강탈 사건'에 대해 진상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신씨가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의 염색기법인 홀치기 신기술을 개발한 뒤 경쟁사에 기술을 도용당하고도 국가권력의 외압에 의해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이번 조사 결정은 지난 1972년 신씨가 특허침해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직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해 재산권을 포기한 개연성이 인정됐기 때문이다.
 
가혹행위 등 인권침해에 대한 심각성을 적극 해석한 것은 물론, 당시 신씨가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했다고 해서 특허권이 확정적으로 소멸됐다고 볼 수 없다는 해석이 더해졌다.
 
진화위 측은 7년여 치열한 법정 다툼 끝에 특허침해에 따른 배상금을 탈 수 있게 된 상황에서 갑작스레 소취하를 하는 행위 자체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또한 소취하 직전 박정희 대통령이 특허기술 도용 업체들에게 유리한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사실도 신씨에 대한 외압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의심케 만드는 정황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이 사건과 관련된 정부부처의 조치 사항 등을 중정부장에게 통보한 일부 보고서 등을 통해 국가권력이 얼마나 계획적으로 개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점도 조사 개시 이유로 제시됐다.
 
연합뉴스

이번 조사의 성패는 신씨가 특허권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국가정보기관과 사정당국 등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 얼마나 가혹한 인권침해 행위가 벌어졌는지를 밝혀내느냐에 달렸다.
 
이를 위해 국정원에 보존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 보고서와 신씨를 문서위조범으로 공작한 검찰 내부 문건 등 주요 단서를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화위 관계자는 "개인의 재산권을 국가권력에 의해 포기하는 과정에서 짓밟힌 인권문제에 초점이 맞춰진 사건"이라며 "장시간 숙고를 거쳐 조사를 결정한 만큼 전문 조사관 주도 하에 내실있는 진상 규명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너무 오래된 사안이라 구체적인 내용들은 더 살펴봐야 알 수 있다"면서도 "2기 진화위에서 자료제공 요청 등이 오면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진실'을 향해…차마 내딛지 못한 '한 걸음'

 앞서 신씨는 1976년 9월 강압으로 인해 자신의 재산권을 잃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서울고등법원에 기일지정신청을 한 바 있다. 특허권 포기가 무효임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신씨는 당시 기일지정 신청서에 "소취하서는 신체의 자유를 잃은 상태에서 어떤 제3자에 의하여 소취하를 하도록 모진 폭행과 협박을 당하고서 날인해 작성된 것일 뿐"이라고 적었다.
 
법원은 신씨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소송종료를 선언했다.
 
1970년 제9회 수출의날 기념식에서 참석자와 악수를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국가기록원 제공

이후 이 사건은 지난 1기 진화위(2006~2010년 활동)에서 사건 조사 신청서가 접수됐지만 기각됐다. 당시는 특허권 관련 재심 제기 기간이 이미 지났고, 과거 중정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증빙하기 어렵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이번 2기 진화위의 조사개시가 있기까지, 신씨는 기다리지 못하고 지난 2015년 눈을 감았다.
 

회사·집 '풍비박산'…"진실 밝혀 명예 회복, 화해로 나아가야"

특허권을 강제로 빼앗기고 문서위조범으로 몰려 옥살이까지 하게 된 신씨. 결국 회사는 몇 해 뒤 문을 닫았고, 가족들은 가난에 시달렸다. 대통령의 한 마디에 신씨 가족의 삶은 무너져버렸다.
 
용보씨는 "전 재산에 친척들 논, 밭마저 팔아 기술개발을 했는데 도용당해 투자금도 회수하지 못했다"며 "신기술로 늘어난 주문은 경쟁사들이 다 가져갔고, 아버지 회사는 망해 집은 경매에 넘어가고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학교도 갈 수 없었다"고 힘들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태극기가 걸린 공장에서 요꼬비기 신기술을 익히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아들 신용보씨 제공

그는 "1972년 5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특허를 개인이 갖는 건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한 뉴스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고 무서웠다"고 했다.
 
바로 다음 날 아버지는 중정 남산분실에 끌려가 특허권을 포기하라는 강요를 받으며 나흘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아들은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후유증으로 병원을 계속 다녀야 했다"며 "특히 우울증이 심했다"고 말했다.
 
용보씨는 아버지 살아생전에 억울함을 풀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한으로 남았다.
 
그는 "생전에 당신이 당한 억울한 일들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며 "돌아가시기 직전 '이제 단념해야겠다'던 아버지의 마지막이 가슴에 사무친다"고 토로했다.
 
또 유가족에게 진실을 찾는 일은 사실 관계를 밝혀내는 것 이상의 의미다. 국가권력의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 신씨가 수출강국 실현에 기여하려던 애국정신과 기술력을 인정받는 동시에, 특허기술로 무역시장을 발전시킨 업체들과도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데 의의를 둔 것이다.
 
신씨는 "비록 기술을 도용했지만 실력 있는 업체들이 무역업을 발전시킨 건 인정한다"며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한 국가의 잘못은 분명히 짚고 심판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특허권을 빼앗기고 형사처벌까지 받은 억울함을 풀고 특허기술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등 아버지 명예를 되찾는 데 진화위 조사가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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