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급자·가출청소년…'경제적 약자' 파고든 신종 부동산 사기

"명의 빌려주면 50만원도 주고 집도 준다"
달콤한 제안에 명의 줬다 살던 집에서 쫓겨난 80대 노인
하다하다 가출청소년까지 접근한 컨설팅 업체들
기초수습 끊겨 생계 위협…임차인도 전세금 못 돌려 받을 가능성

연합뉴스

서울 강서구 임대아파트에 사는 고만상(83·가명) 씨는 요새 잠을 설치는 일이 잦다. 지난 4월 강서구청으로부터 집을 빼달라는 통보를 받고 나서부터다. 함께 사는 딸이 구청에 읍소해 8월까지 시간을 벌었지만 여전히 이사할 집은 구하지 못한 상태로 애타는 시간만 보내고 있다고 한다.

불행의 씨앗은 지난해 7월 지인 채 씨로부터 받은 전화 한 통이었다. 채씨는 대뜸 역삼역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사업가 '서 씨'를 얼른 만나보라며 '달콤한' 제안을 해 왔다. 명의만 빌려주면 용돈 수십만 원을 곧바로 보내주고, 돈 한 푼 들지 않고 빌라까지 계약해 넘겨준다고 했다. 조건도 단 하나 뿐이다. 현재 무주택자여야 한다는 것.

소개해 준 채 씨 본인도 이미 현금 50만원과 빌라 1채를 받았다는 말에 고 씨는 고민 없이 서씨를 만나 신분증과 도장을 내밀었다. 역삼역과 구로구 독산동에 있는 한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번갈아 오가며 계약서를 썼지만 조금도 사기를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뒤 거짓말처럼 고 씨 손에는 서울 구로구와 관악구의 빌라 2채 등기부등본이 쥐어졌다. 계약서상 매매가만 5억 원이 넘는다. 평생 무주택자로 살아온 고 씨가 하루 아침에 돈 한푼 안 들이고 다주택자가 된 셈이다.

하지만 고 씨가 떠안은 빌라는 매매가와 전세가가 동일한 일명 '무갭' 매물이었다. 매매가 잘 이뤄지지 않는 위치인데다 시세보다 높은 보증금으로 임차인까지 끼고 있는 상황. 임차 계약이 끝나더라도 고 씨는 돌려줄 보증금이 없어 고 씨와 임차인 둘 다 적잖은 피해가 불가피하다. 당장 거주하는 집에서 쫓겨날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기초생활보장 수급 등 고 씨 가족이 받던 공적 지원이 고 씨가 수억원의 빌라를 소유했다는 이유로 모두 끊겼다는 점이다. 구청에서 최근 살던 집을 비우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임대아파트는 저소득층 주거안정을 위한 곳이기 때문에 고 씨의 부동산 자산이 늘어나면서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나가야만 한다. 아내와 함께 받던 의료지원 서비스와 장애인 수당(고씨는 장애 6급이다) 등 각종 수당 지원도 모두 박탈됐다. 고 씨 아내는 "우리는 돈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에 불과하다. 지금 사는 집에서 계속 살 수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가장 약한 고리' 취약계층 파고든 '신종 부동산 사기'

고 씨를 꼬드겨 빌라를 거래한 이들은 전형적인 부동산 컨설팅 사기업체인 것으로 파악됐다. 낡은 빌라나 거래가 이뤄지지 않는 신축 빌라를 높은 가격에 전세 계약을 맺게 한 후 부동산 사정에 어두운 노인들에게 명의를 넘기고 수수료를 챙기는 식이다. 고 씨가 이들과 처음 만난 역삼역 사무실을 지난 18일 다시 찾았지만 컨설팅 업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CBS노컷뉴스 취재 결과, 이런 사기 행각은 최근 들어 서울과 수도권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3월 조미숙(74·가명) 씨는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낡은 빌라를, 지난 1월에는 백기태(63·가명) 씨가 경기 화성 소재의 신축빌라를 떠안았다. 모두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부동산 업체로부터 유사한 수법으로 사기를 당했고, 결국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박탈당해 현재 생계 유지가 곤란한 처지가 됐다.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에도 비슷한 사례가 여러 건 접수돼 피해자를 상대로 법률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심지어 무주택 피해자 중에는 가출청소년도 있다고 한다.

이상훈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장(변호사)은 "최근 1년 사이 명의를 빌려달라고 해 소위 '깡통 부동산'을 떠넘기는 사례가 여러 건 접수됐다"며 "보통 부동산을 잘 모르는 어르신들이나 급전이 필요한 가출청소년들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높은 전세금 때문에 부동산을 처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 다세대·연립주택 밀집촌. 연합뉴스

업계·다주택자 '세금 회피' 목적 빌라 처분…희생양된 취약계층

이런 식의 '깡통 부동산 사기'가 기승을 부리지만 관계 당국은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거래 명의가 매수인 본인이라 부동산실명법 위반을 적용하기 애매한 데다, 명의를 준 대가로 돈을 받았기 때문에 수사가 이뤄질 경우 피해자들도 덩달아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도 있어서다.

한 부동산 컨설팅 업계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정부가 담보 대출을 옥죄자 전세 대출을 통한 빌라 매매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이쪽을 막으니 시장에서는 다른 쪽으로 돌파구를 찾은 셈"이라며 "지난해 중순까지는 전문 임대사업자에게 주로 빌라 매물을 팔았지만 취득세 인상(2주택자 8%·3주택자 이상 12%) 이후 업자들이 세 부담이 없는 '무주택자'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분이 곤란한 빌라는 파는 사람들(매도인)은 신축 빌라 건축주이거나 2주택자 이상의 다주택자가 대부분인 것으로 파악됐다. '깡통 전세' 사기를 당한 무주택자가 자신을 속인 컨설팅 업체에 수수료 수백만원을 주면서 비슷한 처지의 제3의 무주택자에게 빌라를 또다시 떠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결국 부동산 업계와 다주택자들이 세금 회피를 목적으로 벌인 행동이 종국에는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취약계층의 막대한 피해를 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는 접수된 유사 피해 사례들을 종합해 형사고발 등 대응책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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