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에 'D램' 1위 오른 삼성전자…'치킨게임'에서 완승하다
지난 2012년 2월 일본 최대 메모리 기업이었던 엘피다가 파산 보호를 신청합니다. 히타치 반도체와 NEC가 합작한 엘피다는 5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가 하면, 영업이익률이 마이너스 70%를 넘었습니다. 팔면 팔수록 손해인 시장에서 더는 버티지 못했습니다. 이에 앞서 2009년에는 독일 지멘스에서 떨어져 나온 반도체 회사 키몬다가 파산했습니다.이로써 글로벌 D램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을 더한 '빅3' 체제로 재편됐습니다. 근 10년이 지났지만 빅3는 건재합니다. 새롭게 이 시장에 뛰어든 업체는 없습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들의 분석을 종합한 아래 표를 보면 지난해 D램 시장은 삼성전자 42%, SK하이닉스 30%, 마이크론 23%의 '삼국지'였습니다.
우리나라 업체들이 D램 시장에 뛰어든 건 1980년대 초반입니다. 미국과 일본 업체가 주도하던 D램 시장에 삼성전자를 비롯해 현대전자와 LG반도체(IMF 구제 금융 이후 두 회사는 지금의 SK하이닉스로 합쳐집니다)가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채 10년도 되지 않은 1992년 메모리 업계 1위에 등극합니다. 시장의 특성을 적극 활용해 경쟁사와의 차이를 더욱 벌리는 '초격차' 전략이 바로 이때 시작됐습니다.
D램의 역사는 '치킨게임'의 역사입니다. 1995년에만 해도 글로벌 D램 업체는 20여 개에 달했습니다. 이후 지속적인 고성능화와 고집적도 연구개발 경쟁 등으로 대규모 설비투자의 사이클이 빨라졌습니다. 장치산업의 특성상 천문학적인 투자가 필요하지만 시제품에서 양산까지는 1년 넘게 차이가 납니다. 경쟁사와 조금만 차이가 벌어져도 이를 다시 따라잡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2000년대 중후반 글로벌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면서 앞서 언급한 회사들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치킨게임'의 승자는 삼성전자였습니다. 시장을 선도하며 홀로 대규모의 흑자를 냈고, 이를 다시 연구개발에 투자해 차이를 더 벌렸습니다. 2006년 세계 2위였던 키몬다가 3년 뒤 파산하고, 그로부터 3년 뒤 엘피다는 마이크론에 흡수됐습니다. D램 시장을 둘러싼 글로벌 '삼국지'의 완성입니다.
도시바·애플에 힘입어 낸드플래시 시장서도 1위에 오른 삼성전자
삼성전자가 또 1위를 달리는 분야가 있습니다. D램과 함께 메모리 반도체의 양축을 이루는 '낸드플래시' 부문입니다. 위의 표를 다시 보시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글로벌 낸드 시장에서 33%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어 도시바에서 떨어져 나온 키옥시아(20%), 웨스턴 디지털(14%), SK하이닉스(12%), 마이크론(11%), 인텔(9%) 순이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가 마무리되면 5강 체제로 개편됩니다.플래시 메모리는 1980년 도시바에 의해 개발됐습니다. 엄청난 양의 정보를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바꿔 저장하는 플래시 메모리는 전원이 없어도 데이터가 유지되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D램보다 읽기와 쓰기 속도가 1만배 이상 느린 '저품질' 메모리로 인식됐기 때문에 초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인텔이 플래시의 다른 종류였던 '노어' 플래시 시장에서 공세에 나서자 원조였던 도시바는 1991년 낸드플래시 개발을 완료하고 시장 진출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도시바는 희대의 실수를 저지릅니다. 1992년 삼성전자에 낸드플래시 기술을 이전해 준 겁니다. 낸드 시장의 전체 파이를 키워 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도시바는 일단 인텔이 주도한 노어 진영에는 승리를 거둡니다. 낸드는 플래시 메모리 시장의 대세가 됐습니다. 문제는 삼성전자였습니다. 당시 삼성전자는 D램과 낸드, CDMA(Code Division Multiple Access·2세대 이동통신 서비스, 지금은 4세대 LTE를 거쳐 5G세대)를 미래의 주력 먹거리로 삼아 역량을 쏟아붓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D램과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세계 1위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낸드의 원조 도시바는 만년 2위로 전락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저장장치인 SD(Secure Digital)카드나 휴대용 USB 메모리 정도에만 쓰이던 낸드플래시는 지난 2005년 애플의 '아이팟' 출시를 계기로 엄청난 도약을 이룹니다. 이어 휴대전화 업계의 가히 혁명으로 기록되는 '아이폰'의 등장은 애플의 든든한 파트너였던 삼성전자에도 큰 성공을 가져다 줍니다. 삼성전자는 이에 앞선 2006년에는 최초의 양산형 SSD(Solid State Drive)를 출시하며 낸드 시장을 더 넓혔습니다.
메모리 분야 '최강자'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쏠림' 현상은 한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플래시를 더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는 올해 글로벌 메모리 시장 매출을 1611억 달러(약 189조 원) 규모로 전망하는데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이 시장에서 절반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습니다.SK하이닉스의 경우 지난해 매출 31조9천억원 가운데 메모리 비중은 94% 수준으로, 사실상 거의 전부였습니다. 더구나 전체 매출 중 D램 매출은 70.6%였고, 낸드플래시가 23.4%로 D램 편중이 더 심했습니다. 다만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가 완료되면 낸드플래시 시장의 글로벌 점유율도 20%까지 높아지며 D램 편중은 다소 완화될 전망입니다.
이처럼 국내 업체의 메모리 매출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글로벌 메모리 업황에 따라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 늘 한계로 지적되곤 합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017·2018년에 이은 글로벌 메모리 호황으로 올해 2분기에도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양호한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연말부터 메모리 업황이 둔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면서 주가는 연중 최저치를 갈아치우고 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사실 전체 반도체 시장의 약 30%에 불과합니다. WSTS의 전 세계 반도체 시장 전망을 보면 올해 매출은 5508억달러(약 648조원)로 추정됩니다. 메모리 분야는 1611억 달러(약 189조 원)로 전체 반도체 시장의 29.2%를 차지합니다. 스마트기기의 폭증으로 메모리 반도체는 내년까지 37.1%의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겠지만 전체 시장에서의 비중은 31.4%로 올해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아래 표를 보시면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위치를 한눈에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툴을 뜻하는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와 반도체 설계자산(IP) 시장은 미국과 유럽이 압도적입니다. 일본은 웨이퍼와 각종 장비 등 이른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강자입니다. 우리나라는 디자인과 제조(Fab) 분야에서, 대만은 제조와 ATP(조립·테스트·패키징) 분야에서 강점을 보입니다.
메모리 넘어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1위에 도전하는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는 논리와 연산·제어 기능 등을 수행하는 반도체로,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두뇌 격인 CPU(Central Processing Unit)와 AP(Application Processor)가 대표적입니다. 또 고성능의 그래픽 처리장치인 GPU(Graphics Processing Unit), 마이크로프로세서(MPU), 카메라에 들어가는 CMOS 이미지 센서 등이 있습니다.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시스템반도체는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를 넘어 가전과 자동차, 건물, 로봇 등에 두루 쓰이며 수요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5G, AI, 자율주행 등 우리나라 미래 산업의 밑거름 역할을 할 파운드리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9년 4월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합니다. 오는 2030년까지 133조 원을 투입해 메모리 분야가 아닌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1위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올해 5월에는 투자 금액을 더 늘려 총 171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삼성전자 김기남 부회장은 당시 "한국이 줄곧 선두를 지켜온 메모리 분야에서도 추격이 거세다"며 "수성에 힘쓰기보다는,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를 벌리기 위해 삼성이 선제적 투자에 앞장서겠다"고 말했습니다.
시스템반도체 부문의 가장 큰 특징은 설계·판매와 제조가 분리돼 있다는 점입니다. 애플과 인텔, AMD, 엔비디아 등은 자사 반도체 물량의 상당수를 대만의 TSMC에서 위탁 생산합니다. 생산 설비가 없는 팹리스(Fabless)와 제조를 전담하는 파운드리(Foundry)의 분업 전략입니다.
절대 강자에 도전하는 2위 삼성전자는 TSMC와 달리 반도체 설계와 생산, 판매까지 모두 수행하는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종합반도체회사)이기도 합니다. 반도체 설계회사 입장에서 볼 때 경쟁사인 삼성전자에 생산을 맡기면 설계 기술이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를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10나노미터 이하의 최첨단 공정에서도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한 TSMC와의 경쟁에서 삼성전자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는 셈입니다.
삼성전자가 주춤한 사이 파운드리 시장을 둘러싼 글로벌 패권 다툼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 대란 이후 미국은 자국 중심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꾀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인텔이 파운드리 업계 3위인 글로벌파운드리 인수를 추진한다는 소식도 흘러나왔습니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견제로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다음번에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