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지난 1일 담화에서 "지금과 같은 중요한 반전의 시기에 진행되는 군사연습"이라며 훈련 축소도 아닌 사실상 취소를 압박했기 때문이다. 북측의 요구를 수용할 수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서 여야와 전문가 집단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입장이 갈리고 있다.
통신선 복원에 따른 남북화해 기류, 김여정 담화로 다시 시험대
특히 김 부부장의 돌출적 담화는 한미훈련 축소 조정으로 수렴해가던 정부·여당의 기류에 오히려 제동을 건 꼴이 됐다. 대북전단 규제 추진 과정에서의 '김여정 하명법' 논란이 재연될 수 있다는 정치적 부담 때문이다. 실제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일 한미훈련에 대해 "예정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송 대표는 이 훈련의 방어적 성격, 실 기동훈련 없는 시뮬레이션 방식, 전시작전권 회수를 위한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북한 눈치보기' 의식한 훈련 불가피성 vs 대화 국면 활용 필요성
그런데 북한이 김 부부장을 또 앞세운 것은 한미훈련을 그만큼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는 비록 한미훈련 취소 또는 연기가 난제이긴 하나 잘만 활용하면 남북·북미 대화 국면이 본격화할 기회임을 뜻한다.
북한의 '대북적대시 철회' 요구와 미국의 '조건 없는 대화 복귀' 주장이 평행선을 긋는 가운데 최소한의 절충 여지를 보인 셈이다. 미국 입장에서 제재완화에 비해 한미훈련 연기는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 부담이 훨씬 적은 카드이기 때문이다.
정성장 센터장은 "북한은 과거에도 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했다가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갑자기 유화정책으로 전환했다"고 지적했다.
김여정 담화로 역풍…북한의 엄중한 인식 보여주는 단면일 수도
하지만 북한의 태도 변화를 단지 내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북한이 최근 '유리한 외부 환경을 주동적 마련'하는 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긴 했지만 '자력갱생 정면돌파'의 큰 틀은 유지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중되는 식량난 등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조차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은 아직은 버틸 힘이 있다는 증거다.
김여정 담화가 남측을 압박하기 보다는 오히려 역풍을 낳고 있지만 그 반작용으로서 북한 붕괴론, 또는 제재 만능론을 다시 꺼내드는 것은 현 상황의 엄중함에 비춰 안이한 발상이기도 하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교수는 "사실 외부의 누구도 북한이 이렇게 빨리 핵물질 생산, 핵폭발, 중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습득하고 고도화할지 몰랐다"면서 이대로 몇 년이 더 지나면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를 얻고 동북아 군비경쟁이 촉발돼 상시적 전쟁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북미 핵협상의 시급성과 재개 방안' 보고서) 북핵 문제는 임계점에 다다랐거나 이미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현 데탕트는 문 대통령-김 위원장 친분 작용…임기말 역할 중요
남북관계를 통신선 복원, 즉 2020년 6월 수준에서 동결해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차기 정부로 넘기자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는 한미훈련을 그대로 진행해도 북한이 어쩔 수 없을 것이란 판단이 깔려있다. 문재인 정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대북 접근을 시도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도 작용한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잠시라도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와도 같다. 한미훈련 강행은 모처럼 조성된 남북 화해 분위기를 훨씬 뒤로 되돌릴 가능성이 크다.
독러 가스전 연결 '메르켈 외교력'처럼 창의적 해법 필요한 시점
한미훈련을 놓고 국방부와 통일부의 입장이 맞서는 상황에서 결국 문 대통령의 결단이 요구된다. 관건은 훈련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국내 여론과 미국을 상대로 어떤 명분으로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달려있다.
박종철 경상국립대 교수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러시아와의 가스전 연결에 부정적인 미국을 설득한 외교력을 지적하며 문재인 정부의 창의적 해법을 주문했다. 그는 남북회담 재개는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 바이든 정부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점에서 스냅백(약속 불이행시 원상 회복) 조항을 활용한 조건부 훈련 연기 방안 등을 거론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전작권 환수를 위한 훈련의 불가피성과 관련해서도 오히려 북핵 위협을 줄임으로써 전작권 환수 기준을 낮추는 발상의 전환, 근본적 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호혜적 한미동맹으로 거듭난 양국관계가 풀어야 할 첫 숙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