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7월 31일) 일본 도쿄 아라아케 아레나는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습니다. 여자 배구 대표팀이 숙명의 한일전에서 기적과 같은 역전승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마지막 5세트 12 대 14, 한 점만 내주면 끝나는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 점, 한 점 침착하게 만회하며 듀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이 당황하며 실수를 저질렀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박정아(28·한국도로공사)가 대역전 드라마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거짓말 같은 역전승에 선수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코트에 원을 만들며 환호했습니다. 선수들의 눈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세계 14위인 대표팀이 5위 일본을 맞아 패배 직전에서 거둔 승리, 그것도 숙적 일본의 수도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거둔 그야말로 '도쿄 대첩'이었습니다. 이 승리로 대표팀은 8강 진출을 확정했고, 일본은 A조 5위로 떨어져 8강행이 불투명해졌습니다.
선수들이 만든 환희의 원에 한 남성도 뛰어들었습니다. 바로 여자 대표팀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42·이탈리아)이었습니다. 라바리니 감독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선수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박정아는 "승리 세리머니에 감독님이 들어온 것은 처음인 것 같다"면서 "기분이 많이 좋았나 보다"며 웃었습니다. 그만큼 기뻤던 겁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승리의 여운은 이어졌습니다.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는 염혜선(30·KGC인삼공사), 박정아에 이어 주장 김연경(33·중국 상하이)의 인터뷰가 차례로 진행됐습니다. 염혜선은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눈물을 쏟았고, 박정아는 "난 안 울었다"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다만 라바리니 감독은 선수들의 인터뷰 중간 믹스트존을 지나쳐 라커룸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승리인 만큼 우리 취재진은 인터뷰를 위해 라바리니 감독을 불렀습니다. 김연경의 인터뷰 도중 라바리니 감독은 다시 믹스트존으로 왔습니다.
이때부터 감독과 캡틴의 티격태격, 티키타카와 같은 환상 호흡이 펼쳐졌습니다. 김연경과 취재진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도중 웃음이 터져 나오자 우리 말을 모르는 라바리니 감독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습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라바리니 감독이 김연경에게 묻자 주장은 친절하게 "오늘 야구, 축구, 배구 중 유일하게 우리가 이긴 소감에 대한 질문"이라고 영어로 설명해줬습니다. 이에 라바리니 감독은 "야구, 축구의 결과는 유감"이라고 말하며 다시금 취재진의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이후에도 문답에 웃음이 나오자 라바리니 감독은 또 참지 못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이에 김연경은 "일일이 통역해주면 인터뷰가 너무 길어지니까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 기다리시라"고 감독을 어르고 달랬습니다. 그러기를 거의 10분. 그동안 지루해진 라바리니 감독이 다시 라커룸으로 돌아가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김연경은 감독을 붙들었습니다. (양 팀 최다 30점을 올린 승리의 주역인 만큼 김연경의 인터뷰가 길어진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라바리니 감독의 차례.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에 취재진도 서둘러 김연경의 인터뷰를 마친 겁니다. 그랬더니 라바리니 감독은 오히려 "김연경 인터뷰를 더 해도 된다"고 짐짓 능청(?)을 떨었습니다. 이에 김연경은 "난 끝났으니 어서 하시라"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첫 질문은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 이후 달라진 부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라바리니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몇 분 동안 답변을 펼쳤습니다. 이에 김연경이 "베리 롱(Very long). 원 퀘스천, 텐 미니트(One question, ten minute)"라며 감독의 말을 끊었습니다. 통역도 해야 하는데 질문 하나에 십 분, 너무 길다는 겁니다.(물론 대표팀 통역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라바리니 감독은 그동안의 기다림에 복수(?)라도 하듯 개의치 않고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2일 세르비아와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까지 남은 일정에 대해 라바리니 감독은 "내일(1일) 하루 훈련하지 않고 휴식을 주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김연경은 "아 진짜 드디어 하루 쉬네"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만큼 라바리니 감독의 훈련이 힘들다는 것이겠지요. (여기에 김연경은 앞선 4경기를 거의 풀타임으로 뛰었습니다.)
이렇게 티격태격했지만 둘 사이의 신뢰는 대단했습니다. 라바리니 감독은 1차 목표인 8강 진출을 이룬 만큼 다음 목표를 묻자 "한 계단, 한 계단 나아가길 원하지만 주장인 김연경이 최종 목표를 결정할 것"이라며 캡틴에 무게를 실어줬습니다.
이어 김연경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질문에 라바리니 감독은 말없이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펼쳤습니다. 그러면서 라바리니 감독은 "나는 주장을 사랑한다"고 말로도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이어 "김연경이 주장으로 있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팀이기 때문에 한국 감독을 선택했다"면서 "김연경이 있어서 자부심도 있고 행복하다"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신의 인터뷰 동안 기다리다 가려는 감독을 붙들며 친절하게 문답 진행을 도운 김연경. 그런 김연경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 라바리니 감독. 팀을 이끌어가는 사령탑과 주장의 '환상 케미'가 있었기에 한국 여자 배구가 기적과 같은 역전승을 이뤄낸 것이 아닐까요?
P.S-인터뷰 말미 라바리니 감독과 김연경, 둘 모두에게 "한국 대표팀만의 팀 워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에 라바리니 감독은 김연경을 가리키며 대답을 하라는 신호를 줬습니다. 그러자 김연경은 "둘 다에게 해당하는 질문"이라면서 라바리니 감독에게 먼저 답변 기회를 배려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연경은 "원 미니트"라고 강조했습니다. 텐 미니트가 아니라 1분만 짧게 하라는 겁니다. 이렇게 감독과 주장의 격의 없는 사이. 한국 여자 배구의 강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감독, 주장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하나인 '원 팀' 정신이 진정한 힘일 겁니다. 김연경은 "결국 팀워크였다"면서 "경험 많은 선배들이 이끌고 후배들이 잘 따라와 한마음 한뜻으로 했기에 역전승이 가능했다"고 했고, 라바리니 감독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못 알아듣지만 선수들이 자매들처럼 지낸다"면서 "그래서 더 (대표팀의 팀 워크가) 특별하다"고 칭찬했습니다. 한일전 승리 뒤 코트에 모두가 하나가 돼 그려낸 원, 그게 한국 여자 배구 '원 팀'의 힘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