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GM이 부평2공장의 전기차 유치에 별다른 전망을 보여주지 않고 있어 2018년 군산 공장 폐쇄의 악몽이 재연될 조짐이다.
이에 대해 미래차 전환을 위한 대규모 정책 지원과 고용 안정을 약속한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앞이 보이지 않는 한국GM 부평2공장, 전기차 유치 가능할까?
한국GM 노사의 임금협상 잠정합의안이 지난 27일 노조 투표에서 부결됐다. 한국GM 노사는 여름 휴가 시즌이 끝나는 이달 중순 다시 잠정합의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잠정합의안 부결을 부른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앞날을 알 수 없는 부평2공장의 미래다.
경영난을 겪고 있는 한국GM은 지난 2월부터는 부평2공장을 절반만 가동하고 있다. 게다가 내년 7월 이후 생산일정이 없어 2018년 군산공장 폐쇄에 이어 부평2공장도 문을 닫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잠정합의안을 마련하면서 노조는 부평2공장에 내년 4분기부터 전기차 생산 라인을 투입하라고 요구했지만, 사측은 부평2공장의 기존 차종 생산 일정을 연장하겠다고만 할 뿐 구체적인 계획은 내놓지 않았다.
노조가 부평2공장 폐쇄를 걱정하는 것은 단순한 기우(杞憂)가 아니다. 미래차 생산을 위한 국내 투자를 추진하고 있는 현대기아차와 달리, 외국 자본이 투자한 완성차업체들은 한국 생산시설에 대한 미래차 투자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GM의 경우 2023년까지 총 22종의 전기차 라인업을 발표하고 2035년이면 내연기관차 생산을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는데, 아직 한국GM에 배정된 전기차 생산 물량은 없는 실정이다.
만약 부평2공장의 기존 생산 일정을 일부 연장하더라도 GM의 기존 내연기관차 생산라인이 사실상 '시한부' 상황인 점을 고려하면,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부평2공장 뿐 아니라 창원 등 나머지 공장도 전기차 물량 확보 여부에 공장의 존립이 달려 있다.
GM에 혈세 8100억원 들어갔는데…전기차 투자, 정부가 적극 요구해야
이런 가운데 정부의 대응이 주목된다. 최근 정부는 자동차 업계의 전기차 전환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정책 목표를 밝힌 바 있다.
한국GM의 잠정합의안이 부결되기 불과 닷새 전인 지난달 22일, 정부는 '선제적 사업구조 개편 활성화 방안'과 '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한 공정한 노동전환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수소차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산업구조 전환이 수월하게 이뤄지도록 관련 기업에 각종 지원과 규제 완화를 약속하면서, 이 과정에서 고용이 위협받는 노동자에게는 직업훈련 등을 돕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노동계는 정부의 고용 대책이 단순한 직업훈련 지원 수준에 머물 뿐, 전기차 등 신규 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확대해 질 좋은 일자리를 확보할 종합적인 고용 유지 계획은 빠져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더구나 다른 외투 완성차업체도 아닌, 한국GM의 전기차 생산 라인 유치에 정부가 개입할 명분은 충분하다.
2018년 경영난을 이유로 군산공장을 폐쇄했던 한국GM은 경영 정상화를 위해 당시 산업은행을 통해 약 8100억원의 '혈세'를 수혈받았는데, 당시 산은은 한국GM이 10년 동안 국내 공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현재 GM 본사는 산은과 약속한 국내 공장 유지 시한인 2027년까지 한국GM에 전기차 생산 물량을 배정하지 않고 있다. GM이 내심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계획 아래, 한국 공장을 계속 내연기관차 생산 라인으로만 남겨둘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이유다.
이에 대해 자동차 업계가 미래차 시장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전기차 생산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외투 자본이 국내 시장을 착취하는 구조가 고착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금속노조 이성희 정책국장은 "현재 자동차 산업은 각 업체가 내연기관차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전기차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자금으로 사용하는 상황"이라며 "만약 국내에 전기차 생산 라인을 확보하지 못하면, 국내 자동차 시장이 GM의 전기차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용도로 전락하는 셈이 된다"고 지적했다.
美본사 설득도 쉽지 않고 생산 준비도 부족…"한국GM은 매력적인 전기차 생산기지" 반박도
다만 한국GM의 전기차 물량 유치를 둘러싼 상황이 녹록치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전기차 구매 보조금 예산에만 1천억 달러를 배정했는데, 이 보조금 지급 대상은 미국에서 생산되거나 미국산 부품이 절반 이상 들어가야만 한다는 조건이 달려있다. 또 정부 기관의 공용차량 44만대를 전기차로 바꾸되, 연방정부가 물품을 조달할 때 미국산을 우선으로 하는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행정명령도 내려졌다.
호서대학교 이항구 기계자동차공학부 교수는 "GM으로서는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생산 물량을 배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며 "만약 배정하더라도 미국은 경쟁력이 떨어지고, 중국은 현지 합자사가 있고, 유럽은 GM이 철수했기 때문에 수출할 곳이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만약 유치하더라도 관련 협력업체들이 전기차를 충분히 만들 수 있느냐도 문제"라며 "당장 전기차 전환을 제대로 준비한 부품 업체들도 거의 없고, 정부 지원도 현대기아차에 비해 외국계 3사는 우선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특히 모터, 인버터와 컨버터 등 전기전자 부품산업과 소프트웨어산업의 경쟁력이 매우 낮고, 인력도 부족하다"며 "이를 지원할 시스템조차 부재한 상황이어서 부품업계의 미래차 전환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오민규 연구실장은 "오히려 한국GM은 전기차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반박했다.
오 연구실장은 "GM의 1세대 전기차인 스파크EV를 한국에서 개발해 생산했고, 2세대 전기차인 볼트도 한국GM이 개발했다"며 "생산 경험도, 연구개발 역량도 충분한 수준을 넘어 GM에서 가장 뛰어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또 "볼트에 들어가는 부품의 60% 가량을 한국에서 납품하고 있기 때문에 부품 인프라도 충분하다"며 "수출하기 어렵다지만, 볼트가 가장 많이 팔리는 곳이 미국, 노르웨이에 이어 한국이 3위일만큼 한국만으로도 매력 있는 전기차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산별 노사정대화부터 시작…고용안정·부품업체 상생 반드시 전제돼야"
물론 급변하는 자동차 산업 구조 전환 속도를 감안하면 국내 자동차 업계, 특히 부품 업체들의 변화가 시급한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노동계도 비단 한국GM 뿐 아니라 자동차 산업의 구조 전환을 위해 다양한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 노동계는 최근 '자동차산업 노사정포럼'을 통해 외국계 완성차 3사 노사정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바 있다. 또 지난 12일에는 노사 4개 단체가 국회 지원을 요청하는 공동건의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금속노조 정주교 부위원장은 "산업 전환기에 여러 제도를 바꾸려면 정부의 역할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논의의 틀이 될 산별 전환 협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며 "인천 등 지자체와도 노사정 포럼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단순히 신산업을 유치하기 위한 무분별한 지원으로 흘러서는 안된다는 경고했다.
정 부위원장은 "자동차 산업과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이 계속 지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선제적으로 GM 측이 지켜야 할 선을 제시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며 "한국GM에 얼마든지 지원해도 좋지만, 쿼터제 방식이든 무엇이든 반드시 국내 부품업체의 부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저희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전기차 물량을 유치하기 위해 '당근' 뿐 아니라 '채찍'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오 연구실장은 "2018년 혈세 투입 직후 제기됐던 한국GM의 이전가격 논란은 조세심판원에서 2년 넘게 분쟁 중이고, 비정규직 불법파견 관련 소송도 현재진행형"이라며 "우리 정부가 결코 GM을 상대로 저자세로 나설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국장은 "각종 친환경 규제 정책을 적극 추진하는 것이 꼭 자동차 산업을 위축시킨다기보다 구조 전환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며 "한국GM이 당장 전기차를 생산할 수밖에 없도록 정부가 적극 조치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