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군이 작성한 기록이나 다른 참전군 폭로, 그리고 피해 마을 생존자 증언과 궤를 같이하는 대목이 많아 향후 진상규명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67년 해병대 청룡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중부에 파병됐다는 류진성(75)씨는 7일 국회에서 열린 '특별법 제정' 관련 간담회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이렇게 밝혔다.
류씨는 2018년 한국군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서도 재판부에 구체적인 전황을 밝혔었다. (관련 기사 : 베트남학살 참전군 "살려달라던 노인, 선임병이 쐈다")
다만 그때는 모자이크 처리된 영상만, 그것도 익명으로 방청인들에게 공개했었고 실제 얼굴과 실명을 노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어 "'잡아놓은 민간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물었더니 중대장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는 말을 3소대 애들에게 들었다"며 "모여있는 양민을 전부 사살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다음 날 도로 정찰을 나갔는데 수백 명이 모여서 소리를 치고 삿대질을 하고 낫이나 죽창을 흔들었다"며 "정말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처럼 짧은 시간에 공포를 느꼈을 때는 없던 것 같다"고 토로했다.
또 "옆을 보니까 양쪽 길에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그 위에 시체를 전부 줄지어 뉘어 놓았더라"며 "우리 중대 3소대에서 명령이 하달돼서 집단 사살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문제는 두 달 뒤인 2월 12일 청룡부대 1대대 1중대가 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뒤 주민 7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는 것. 당시 주월 미군사령부는 한국군이 학살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우리 군은 '베트콩 소행 가능성'을 들며 부인했다.
당시 한 보병소대에 몸담았던 홍모(76)씨는 CBS노컷뉴스 취재진과 만나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오인해서 죽인 일이 작전 때마다 있었다"면서도 대규모 학살은 없었다고 부인했었다.(관련기사 : [단독] 참전군 폭로 "베트콩 구별안돼 민간인 총살했다")
한편 이날 간담회는 더불어민주당 기동민·이재정·이규민·이소영, 열린민주당 강민정 의원과 한베평화재단이 공동 주최했으며 다음 달 관련법 제정 공청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다음은 류진성씨 발언 전문 |
이 자리에 나온 제 심정이 착잡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 있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둡고 불편한 과거는 다 털어버리고 가는 것이 오히려 더 떳떳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는 1967년도 해병대에 입대해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배속이 되어 한 3개월 정도 동네 부대에서 근무를 하다가 그해 67년도 10월, 그러니까 청룡부대 3차 10진으로 베트남 '추라이'라는 곳에 파견이 됐습니다. 추라이의 144고지라고 하는 산꼭대기에 부대가 있는데, 그곳이 1대대 1중대 벙커입니다. 여기에서 한 1개월 정도 베트남 참전의 어려웠던 소위 신병 기간을 버티고, 바로 호이안이라는 곳으로 부대 이동을 하게 됐습니다. 1대대 1중대가 호이안으로 이동하는데, 맨 끝에 가는 부대였습니다. 굉장히 위험했죠. 끝에 가는 부대는 꽁무니기 때문에 공격을 많이 당합니다. 우리나라 지형으로 말하면 추라이라고 하는 곳은 한 충주 정도 됩니다. 거기에서 호이안은 우리나라로 치면 한 의정부 정도 위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위에 우리 앞에 있는 부대는 미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후위라는 곳입니다. 가장 위험하죠. 부대가 이동한다는 것은 현재 있는 그 지형을 어느 정도 평정을 해놓고 어느 정도 위험이 해소됐다 했을 때 다시 새로운 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해 가는 겁니다. 호이안으로 이동하니까 주위의 전황도 추라이때와는 너무 상이하게 달랐고 그 규모라든지 지형이라든지 새롭고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그런 곳이어서 희생자가 좀 우리 청룡부대로서는 가장 많이 희생됐다고 하는 차수가 바로 67년도 추라이에서 호이안으로 이동하던 그 시기, 3진들이 피해 규모가 가장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호이안으로 이동하면 새로운 지형이기 때문에 중대마다 지정된 장소로 이동을 해서 거기서 적들과 싸워가면서 자기 자리를 잡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1중대가 자리가 지정이 되면, 1중대가 들어가서 그 지역을 평정하고 개척을 해서 '중대 방석'을 만들게 됩니다. 근데 우리는 맨 후미에 갔기 때문에 다른 중대의 방석을 잡는 데 지원을 해서 다른 부대들의 방석을 잡아주고, 그러고 나니까 맨 마지막엔 우리밖에 남지 않았는데 우리는 당시 지형으로 봐서는 밀리는 쪽이 아니라, 호이안에 디엔반이라고 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읍 정도 됩니다. 그 지역의 군청을 우리가 1중대 방석으로 사용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주어진 주 임무는 디엔반에서 다낭으로 가는 중요한 도로죠. 보급이라든지 모든 야전 군병원 시설이라든지 물류가 모두 다낭항에 집결돼 있습니다. 그 통하는 국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도를 뺏기게 되면 모든 공급 루트가 차단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중대가 매일 임무가 도로 정찰을 했습니다. 도로 정찰을 매일 하면서 우리 신병이 베트남에 들어오게 되면 다낭항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신병 들어올 때마다 우리 1중대가 커버해서 신병을 인수해서 오고 그런 임무를 하면서 간혹 주변에 작전 명령이 떨어지면 작전을 나가게 됐는데, 1번 국도 우리가 도로 정찰하는 지역에는 또 도로 지키는 미 해병대 '캡 소대'라는 부대가 있습니다. 조그마한 규모인데, 일개 소대 정도 인원이 거기에 상주하면서 도로를 지키는 미 해병이 캡 소대라고 합니다. 거기는 미 해병대하고 베트남 정규군하고 합동으로 근무를 하는데 저희가 도로 정찰을 하면서 보면 자주 부대가 전멸을 당합니다. 저녁이면 기습 공격을 해서 가보면 완전히 다 전멸한 상태, 그러고 나면 새로 신병이 또 배치돼서 들어오고 그런 과정을 여러 번 목격을 했습니다. 68년도 2월, 1번 국도가 일직선으로 쭉 뚫려 있고 양쪽이 논입니다. 우리 용어로는 개활지라고 합니다. 그 논을 건너서 한 500m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데 거기에 마을이 있습니다. 베트남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입니다. 거기에 당시에는 추수가 끝나고 논에 작물이 없을 때입니다. 논도 바닥에 작물이 없으니까 말라 있던 편이었고. 그게 무슨 작전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중대가 거기 작전을 펼치고 나가는데 1소대, 2소대, 3소대 횡대로 마을을 향해서 진입을 해서 진격을 하는데 들어가자마자 총알이 한방이 날아왔습니다. 그때 우리 아군이 한명이 총알에 부상을 당해서 그때 아마 헬기도 요청해서 헬기가 부상당한 환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도록 우리가 사주경계를 해주고 후송이 끝나고 나서 진격을 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 보니까 남자들은 없고 대개 베트남에는 민가마다 집안에 토굴이 다 있습니다. 전쟁에 시달리며 살다 보니까 집집마다 토굴이 다 있어요. 그래서 토굴을 향해 '나오라'고 소리를 치고 그러면 겁에 질려서 피신하지 못한 부녀자들, 노인들이 나옵니다. 왜? 안 나오면 그 안에다가 수류탄을 터뜨리기 때문에 그걸 알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나오라고 하면 나옵니다. 나와서 전부 끌어내서 논바닥 가운데 전부 집결을 시켜놓고 그 과정에 현장에서 사살한 민간인들도 있습니다. 우리 소대에서도 노인 한 분을 사살했습니다만. 그리고 그 부녀자들하고 노인들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전부 논에다 모아놨는데 그때 그 위치가 3소대가 작전하던 그 위치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을을 벗어나서 또 더 진격을 해야 하니까 '잡아놓은 민간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니까 당시 중대장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고 해요. 3소대 애들한테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신호라는 건 다 알죠. 그래서 모여있는 양민을 전부 사살을 한 거죠. 그리고 우리가 그 마을을 지나서 작전을 또 계속했는데 저녁에 거기에서 야영을 한다고 전부 방공호를 파라고 해서, 방공호를 다 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작전이 변경이 돼서 모두 철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마 그 사건이 그 앞에 있는 미군 캡 소대에 목격이 되고 문제가 심각하게 퍼져가지고 긴급보고가 되고 또 청룡부대에 전달이 되고 해서 작전을 더 이상 진행을 못 하고 아마 철수명령이 내려온 걸로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야영을 끝내고 중지하고 디엔반 중대 방석으로 모두 철수를 했습니다. 그다음날 도로 정찰을 나갔는데 제가 1중대 작전을 하면 첨병을 거의 섰습니다. 첨병은 맨 앞에 가는 사람입니다. 어제 작전했던 그 지역 도로 근처를 오니까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 있어요. 앞에 도로를 막고. 그래서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가까이 가는데 수백명이 모여서 소리를 치고 삿대질을 하고 낫을 든 사람은 낫을 흔들고 죽창 든 사람은 죽창을 흔들고 고성을 치고 그러는 거예요. 맨 앞에 가는 나로서는 정말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저기를 어떻게든 뚫고 나가야 되잖아요. 내가 여기서 이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우리는 다 죽겠구나. 정말 얼굴에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총 개머리판으로 도로를 막고 있는 민간인들 밀쳐 내고 헤치면서 뚫고 거기를 통과했습니다. 그때처럼 그 짧은 시간에 내 인생에서 공포를 느꼈을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보니까 양쪽 길에 거적때기를 깔아놓고 그 위에다가 시체를 전부 줄지어서 거기에 뉘어 놓은 거예요 그때 저는 상황 파악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다 죽였구나 어제' 그때 심정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로 정찰을 마치고 부대에 돌아와서 그 상황에 대한 전우들끼리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중대 3소대에서 그런 명령이 하달돼서 집단 사살을 한 것으로 드러났고. 그러고 한 두달 정도 있다가 중대장이 본국으로 송환 명령이 떨어졌다고 해서 본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태가 굉장히 심각했던 것으로 압니다.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거짓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 해병대 캡 소대가 그 앞에서 현장을 다 봤기 때문에 꼼짝없이 변명도 못 하고 아마 그러다 보니까 중대장을 본국으로 송환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2개월 정도 되니까 중대장이 왔습니다. 왜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중대장이 와서 '지금은 어디 계십니까' 하니까 베트남의 군에는 신병들 특수교육대라는 곳에서 교육을 3주간 시켜서 참전을 시켜서 거기 특수교육대 교관으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서 조사 나오면 '얘기를 잘하라'고 당시 중대장한테 그 얘기를 들은 게 뚜렷이 기억이 납니다. 이 전쟁터에서의 일은 사실 나도 죄의식을 느껴본 일은 없습니다. 군은 지휘계통에 의해서 명령을 수행하는 전사일 뿐입니다. 제가 또 좀 변명 같지만 이해하건대 전쟁이라는 건 일어나선 안 됩니다. 전쟁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전략, 전술이 있습니다. 상대에게 적군에게 우리 약점을, 허약한 점을 보여선 안 됩니다. 그러면 공격을 자주 받게 되고 희생이 커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한국군에, 해병대의 그런 잔인성을 민간인 학살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 군인 해병대의 위용을 보여주려고 한 것 아닌가, 그 이유는 우리 아군의 희생을 좀 줄여보고자 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일 관계 식민지 시대 위안부들의 문제를 일본과 시끄럽게 싸우고 있습니다. 베트남, 우리 국가의 사과나 보상을 요구한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중국 다음으로 베트남에 많이 진출해서 기업을 모두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나라가, 그렇게 협력이 돈독하게 이뤄지고 있는 나라가 베트남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런 좋은 관계 미래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그들이 요구하지 않을 때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또 우리가 잘못을 진솔하게 사과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기를 희망하는 차원에서 제가 이 아픈 기억을 더듬어봤습니다. 이상입니다. -증언 결심 계기는? = 제가 광주 민주화운동의 시민 학살 사건을 보면서 그걸 증언한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이건 베트남…물론 국적은 다르지만, 그런 점에 아픔을 느꼈고 또 특수부대라고 하면 군인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또 군은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법적으로 물론 도덕적 책임은 있겠지만 명령에 의해 행해지는 행동에 대해 처벌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명령을 내린 군인이라면 장군이라면 자결하는 것이 장군다운 행동입니다. 부하들한테 미룰 게 아니라. 그리고 군인은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하고 또 증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군인이고 그것이 특수부대입니다. 그런 진정한 군인들이 늦기 전에 나와줬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