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이정철을 징역 1년 및 벌금 1억 원에 처한다. 다만 형을 집행일로부터 2년간 유예한다.
피고인 P사를 벌금 8억 원에 처한다.
피고인 M사를 벌금 15억 원에 처한다."
개정 중대재해법으로 바라본 구의역 스크린도어 김모군 사망사건에 대한 모의재판의 판결 내용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서울메트로 대표에 벌금 1천만 원, 하도급 업체인 은성PSD 대표에 징역 1년·집행유예 2년, 은성PSD에 벌금 3천만 원이 내려졌던 기존 판결과는 완전히 결을 달리하는 내용이어서 파급력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은 1일 서울대 로스쿨 모의법정에서 김군 사건을 중대재해법 개정안으로 다뤄보는 모의 산재시민재판을 열었다.
이 의원은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벌금 하한을 1억 원으로 하자는 중대재해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인물이다.
이날 재판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아직 계류 중인 중대재해법 개정안을 적용했다는 점과 국내 재판에 도입되지 않고 있는 형량 배심원제를 통해 형량이 정해졌다는 점이다.
이 의원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산재 사망사건 한 건에 노동자 한 명 죽을 때 법원이 송구하는 평균 액수가 450만 원 수준"이라며 "'판검사가 죽어도 이러겠느냐'는 비판이 수십 년째 나오고 있는데 이런 부분이 개선이 안 되는 이유는 소위 '키보드 형량'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재판 결과를 기준으로 형량을 정하는 대신 산재 전문가, 범죄피해 단체, 일반 시민 등의 의견을 듣고 판사가 형량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의 법정에 형량 배심원제를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재판장을 맡은 박시환 전 대법관은 오랜 판사 경력을 살려 실제 법정처럼 재판을 진행했다.
검사 측은 원청과 하청 기업 모두 사전에 안전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외면, 이른바 '죽음의 외주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심문했다.
검사 류승혁 역을 맡은 배우 방중현은 사고 당시의 모습이 담긴 영상화면과 김군의 유품인 가방 속 물건들을 가리키며 "일하며 살고, 살며 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입니까. 기업을 위해 희생해도 되는 목숨은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당시의 근무 인원과 장애신고가 들어온 곳의 숫자,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아무리 빨리 점검을 해도 실제 점검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역마다 20초 남짓"이라며 "본 사건은 기억의 맹목적 비용절감이 부른 예견된 참사다. 관리감독의 책임은 최고책임자인 대표에게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피의자인 서울메트로의 가명인 M사의 대표인 이정철, 은성PSD의 가명인 P사의 대표 정은성은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구조적인 문제점 때문에 인력을 충원하기 어려웠다고 항변했다.
정은성은 최저가 입찰로 인한 잦은 스크린도어 고장, M사의 인력을 그대로 넘겨받은 덕에 발생한 자금난 등 자신이 대표로 취임하기 이전부터 경영상태가 엉망이었음을 호소했다.
이정철은 김군의 죽음이 애석하다면서도 스크린도어 관련 업무는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업무가 아니라 P사의 소관이라고 주장했다.
변호사 김석훈 역의 배우 서광일은 "현실적으로 최고책임자가 실무자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경찰이 잘못하면 검사가 책임치느냐"며 반박에 나섰다.
국회 입법조사관 역으로 직접 재판에 참여한 이 의원은 산업현장 내 인명사고 발생 시 해당 기업에 평균 8억 원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는 영국을 사례로 들며 현장의 관리소장에게 책임을 묻는 현재의 처벌 방식에서 탈피해 안전망을 구축할 자금력이 있는 기업에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검사와 변호인의 최종의견까지 들은 배심원들은 따로 마련된 방으로 이동해 형량과 관련한 열띤 토론을 펼쳤다.
무려 30분이나 진행된 토론 결과에 대해 박 전 대법관과 박판규 변호사, 권오성 교수 등 재판부는 또 한 차례 신중한 논의를 거쳐 최종 형량을 판단했다.
재판부가 내린 판결은 파격적이었다.
P사의 대표인 정은성에게 징역 1년 실형과 벌금 5천만 원이 선고됐고, M사의 대표인 이정철에게도 집행유예이긴 하지만 징역 1년과 벌금 1억 원이 선고됐다.
여기에 별도로 P사에 8억 원, M사에 15억 원의 벌금이 부과됐다.
원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실형이 선고됐음은 물론, 벌금의 규모 또한 적게는 10배에서 많게는 20배가 넘게 늘어났다.
다양한 국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김군 사건에 대한 법감정이 산업안전법을 기준으로 한 기존 판결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재판장을 맡았던 박 전 대법관은 재판 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양형할 때 재판관 3명의 의견 반영은 최대한 자제한 채 위원들의 의견을 평균만 냈는데 위원들의 처벌 수위가 확실히 셌다"며 "실형은 생각도 못 했는데 선고가 됐고, 벌금도 M사와 P사의 재정규모의 차이를 고려해 따로 내려졌다"고 설명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 의원은 이날 모의재판을 통해 "중대재해법과 형량 배심원제가 무작정 강력한 처벌만을 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법조인들까지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지혜가 모이도록 했다는 점에서 성과를 거뒀다"며 "배심원들도 개인의 책임과 기업의 책임을 나누는 섬세한 집단지성을 발휘했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다만 이날 행사를 참관한 고(故) 김용균씨의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과 지난해 이천 물류창고 화재사고 유가족인 김지현씨 등은 이같은 법제도 강화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부분이 여전히 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인과관계 추정 조항이 꼭 있어야 한다. 유족들이 너무 큰 아픔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증거를 찾아 싸워야 한다는 점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판례를 보면 사고 기업의 최고책임자들이 자신이 실무책임자가 아님을 이유로 빠져나가는데 이런 부분을 오히려 강하게 처벌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박 전 대법관은 "이런 부분에 대한 시민들의 문제제기가 있었고 희생자도 나왔기 때문에 이를 획기적으로 바꾸고자 한 중대재해법이 나온 것"이라며 "우리 사회에 맞게 법이 따라가고는 있지만 너무 늦게 따라가다 보니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 의원은 "모의재판을 준비한 취지는 한 마디로 '진짜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며 "오늘의 재판이 중대재해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데도 힘이 실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