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표는 ‘전제조건 없는 대화’를 거듭 촉구함으로써 협상에 앞서 인센티브를 줄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북한도 거의 즉각적으로 “꿈보다 해몽”이라며 대화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처럼 양측의 팽팽한 기 싸움으로 인해 앞으로도 한동안 교착국면이 불가피해졌다. 따라서 향후 북미대화 재개는 그 전제조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지게 됐다.
◇ 美, 북한에 ‘대화 회피’ 책임 전가하고 현상유지…다목적 포석
먼저, 전제조건을 반대하는 미국의 셈법은 다목적이라 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만나자’는 포용적 느낌의 메시지는 대화 회피 책임을 북한에 넘기는 효과가 있다.
이로써 현상 유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한국이 대북접근에 나설 명분도 약화시킨다. ‘조건 없는 대화’는 근본적으로 강대국 논리다. 북한이 조건을 운운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우월적 시각이 깔려있다.
상대를 기선 제압함으로써 협상력을 높이면 좋고, 만약 북한이 웅크린 채 시간을 끈다 해도 나쁘지 않다는 계산이다.
반면 북한의 셈법은 단순하다. 하노이 회담 실패에 따른 보상심리로 전제조건을 오히려 강화했다.
협상의 종착점이어야 할 ‘적대시 정책 철회’를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는 무리수이자 약자의 허세다. 당시 최선희 부상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이나 같다.
앞으로 이러한 기회가 다시 미국 측에 차려지겠는지 장담하기 힘들다”고 한 것은 북한이 느꼈을 분노와 당혹감을 말해준다. 김보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이사장은 최근 제주포럼에서 “기대가 좌절로 돌아서자 북한은 더 극단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 北, 수위 조절로 대화 여지는 남겨둬…6.25에 ‘미제’ 표현도 사라져
양측의 줄다리기가 협상을 앞둔 신경전 수준인지 본질적 입장차에 가까운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북한은 일단 대화의 여지는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 당국자는 “(김여정 부부장 등의 담화가) 몇 가지 조금 예외적 측면이 있는 걸로 보고 주시 중”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완전히 판을 깰 의도였다면 훨씬 거친 표현과 형식을 동원했을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탈북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의원(국민의힘)도 6월25일자 북한 노동신문에 ‘미제’(미 제국주의) 표현이 없는 점을 지적하며 미국의 추가 행동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미국이 계속 원칙적 입장을 고수하고 북한도 완강히 버티기에 나서면 전망은 암울해진다. 미국은 싱가포르 공동성명 존중 등으로 이미 양보할 만큼 했다고 인식할 수 있다.
반면 북한으로선 아직 구체적인 ‘당근’을 손에 얻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북한은 특히 자신들은 비교적 북미합의를 지키고 있음에도 미국은 그렇지 않은 것이 불공정하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미훈련이 됐든 제재완화가 됐든 최소한의 성의표시가 있어야 협상이 비로소 균형을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은 물론 북한도 굳이 현시점에서 대화에 연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다. 미중갈등 속에 중국이 북한에 급속히 접근하는 환경은 북한의 새로운 전략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가운데 8월 한미훈련이 예정대로 실시된다면 북한이 그동안 자제했던 도발을 재개할 수 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구조가 더욱 강화되면서 북한의 비핵화 기회가 영영 물 건너갈 위험이 크다.
결국 남은 것은 한국의 ‘중재자’ 역할이지만 이 역시 제한적이다. 미국의 남북대화·협력 지지에도 불구하고 대북제재의 틀 안에서의 얘기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가 비상한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정세는 머지않아 또다시 급류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