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판사 김형석)는 25일 넷플릭스가 SK브로드밴드를 상대로 제기한 채무부존재확인 소송에서, 넷플릭스 측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계약 자유의 원칙상 계약을 체결할지, 어떤 대가를 지불할 것인지는 당사자들의 협상에 따라 정해질 문제"라고 판결했다. 망 사용료 계약 여부와 지급 규모 등은 법원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당사자간 협상으로 해결할 문제라는 것이다. 즉, 넷플릭스에 망 이용대가 협상을 요구해 온 SK브로드밴드의 입장을 전적으로 수용한 셈이다.
재판부는 넷플릭스가 SKB에 계약 협상의무가 있음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한 부분은 각하했다. "넷플릭스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보면 협상 의무의 확인 이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이번 소송 결과는 인터넷 업계의 '뜨거운 감자'인 망 사용료에 대한 판례로서 향후 인터넷 생태계에 중대한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기업이 법제도를 회피해 국내 인프라에 '무임승차'한다는 논란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 트래픽 급증에 업계 간 비용 갈등 소송전 비화
이번 소송의 발단은 넷플릭스의 트래픽이 급증하기 시작한 2019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8년 100만명에 못 미치던 넷플릭스의 국내 가입자는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200만명을 훌쩍 넘어설 정도로 급성장을 거듭했고 관련 트래픽도 폭증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4분기 국내 트래픽을 분석한 결과 넷플릭스는 전체 트래픽의 4.8%를 점유해 구글(25.9%)에 이은 2위로 나타났다.
이는 5위권 내 국내 업체인 네이버(3위·1.8%), 카카오(4위·1.4%), 콘텐츠웨이브(5위·1.2%)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이다. 그러나 국내 업체와 달리 넷플릭스는 국내 통신사에 망 사용료를 내지 않고 있다.
SK브로드밴드는 국내 OTT 이용자 급증으로 최근 몇 년간 넷플릭스 트래픽이 급증해 네트워크 투자 비용이 폭증하자 "망 이용대가를 달라"며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SK브로드밴드는 지난 2019년 11월 방송통신위원회에 재정신청을 냈다. 올해 4월 방통위는 "넷플릭스의 협상 거부에 설득력이 없다"는 요지의 내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재정 신청 결과 공개를 앞두고 넷플릭스는 소송을 제기했다. "망 사용료를 낼 수 없다"는 내용의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한 것이다.
◇ "망 관리는 인터넷서비스업체 책임" 망 이용료는 '이중과금'
세 차례에 걸쳐 이어진 공판에서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는 '망 이용 대가'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놓고 공방전을 펼쳤다.
넷플릭스는 SK브로드밴드에 망 이용료를 내는 것은 '이중과금'이라고 주장한다.
넷플릭스는 망 이용을 '접속'과 '전송'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송은 ISP의 역할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접속'에 대한 비용만 내면 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는 자사가 본국인 미국에서 이미 AT&T라는 통신사에 '접속료'를 냈기 때문에 SK브로드밴드에 추가로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또 넷플릭스의 한국 서비스는 일본과 홍콩에 둔 데이터 임시 저장고인 캐시서버를 활용하는데, 이곳에 설치한 콘텐츠전송네트워크(CDN)가 ISP의 역할을 하므로 추가로 접속료를 낼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즉, 넷플릭스는 캐시서버를 제공하는 업체에 낸 '접속료'로 콘텐츠제공사업자(CP)로서 비용은 다 치렀을 뿐더러 SK브로드밴드가 일본 캐시서버에서 데이터를 받아오는 데 따른 '전송료'는 SK브로드밴드의 몫이라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넷플릭스는 "망 관리는 인터넷서비스제공업체(ISP)의 의무인 만큼 자신들이 망 사용료를 낼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특정 서비스에 대해 망 사용료를 요구하는 것이 모든 콘텐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망 중립성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도 논거로 내세우고 있다.
◇ SK브로드밴드 "망 사용, 공짜 아냐"…"무임승차 그만"
SK브로드밴드는 넷플릭스가 '망 무임승차'를 시도한다고 반박한다. 전 세계 어디에도 "접속은 유료, 전송은 무료"라는 인터넷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데, 전송이라는 무리한 개념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SK브로드밴드 측은 '접속'은 속도와 용량, 즉 전송까지 포함된 개념이기 때문에 분리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또한 CDN은 CP의 일부분인 만큼 넷플릭스의 CDN과 국내 ISP 망이 만나는 구간에서 '접속'이 발생하기 때문에 접속료를 수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넷플릭스가 자사 CDN을 오픈커넥트(OCA)라는 이름으로 내재화한 만큼 CDN은 ISP가 아니라 CP라는 것이다.
즉 '접속료'와 '전송료' 구분은 넷플릭스의 자의적 주장일뿐, 망 사용은 기본적으로 유상이라고 강조했다. 망 중립성 원칙에 대해서는 차별 금지가 기본 취지로, "망 사용이 무상이라는 원칙이 아니다"라며 거듭 반박했다.
또한 넷플릭스는 '사적 합의'일 뿐이라고 하지만, 넷플릭스가 미국과 프랑스 등 통신사에 비용을 지불한 사례는 엄연히 '망 사용료'라고 SK브로드밴드는 지적했다.
◇ 비용 증가 불가피…망 사용료 논란은 계속될 듯
이번 소송은 단순히 두 회사끼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터넷서비스제공사업자(ISP)와 콘텐츠제공사업자(CP)가 첨예하게 다퉈온 망 사용료 논란에 대해 법원의 판단을 구했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이번 판례로 네이버·카카오 등 CP와 KT·LGU+ 등 ISP 간의 망 사용료 지급 관계가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네이버의 경우 1년에 ISP에 주는 망 사용료가 1천억원을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넷플릭스는 패소 이후에도 애초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넷플릭스는 판결 이후 입장문에서 "ISP가 콘텐츠 전송을 위해 이미 인터넷 접속료를 지급하고 있는 개개 이용자들 이외에 CP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라며 "전 세계 어느 법원이나 정부 기관도 CP가 ISP에 '망 이용대가'를 지급하도록 강제한 예가 없다"고 밝혔다.
넷플릭스는 아직 항소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만약 1심 재판부의 이번 판결을 받아들이면 망 사용료 문제의 공은 다시 정부 쪽으로 넘어갈 전망이다.
이번 판례에 따라 온라인 콘텐츠 가격과 인터넷서비스 가격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비용 증가분을 서비스 이용료에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결국 콘텐츠 또는 인터넷서비스 한쪽의 요금 '줄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넷플릭스가 망 사용료로 추가 비용을 부담할 경우 '월정액 인상' 카드를 통해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디즈니플러스 등 다른 OTT들에도 영향을 줘 OTT 구독료가 연쇄적으로 오르는 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국내 인터넷 생태계 질서를 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양측의 주장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의 입장까지 고려해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