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게 인사를 나눈 박 경위는 이내 간밤에 별일은 없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위를 살폈다. 광장 한쪽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노란 종이박스 위에 이불을 깔고 아직 곤한 잠에 빠져있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상태를 빠르게 '스캔'하며 다가서는 박 경위에게 몇몇 노숙인들이 "별 단 거 축하한다"고 축하인사를 건넸다.
전국 유일의 '노숙인 전담경찰관'인 그는 지난 14일 경사에서 경위로 특진했다. 100명이 넘는 노숙인 확진자를 찾아내 병원에 인계하는 등 코로나19 감염으로부터 노숙인들을 보호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범인을 검거했느냐' 위주로 (특진을) 했는데 지금의 패러다임은 좀 다르다"며 "얼마나 (시민들과)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는지, 얼마나 많은 피드백이 오는지로 (기준이) 바뀌었다. 운이 좋았다"고 멋쩍게 웃었다. 같은 일자로 특진한 경찰관은 전국적으로 24명으로, 이 중 박 경위처럼 경사에서 경위로 진급한 이는 단 3명뿐이다.
그와 날마다 얼굴을 마주한 노숙인들에게도 그의 진급은 큰 이슈다. 박 경위의 승진을 알고 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노숙인은 "(별을) 달 것 같았다. 딱 내 예감이 맞다"고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서울역에서 잔뼈가 굵은 노숙인들은 경찰 계급은 물론 남대문서장이 누군지, 매일 순찰을 누가 도는지 등도 훤히 알고 있다는 게 박 경위의 설명이다.
"봉주 아저씨, 누나. 일어나셔야죠. 이따 (또) 올게요." 광장 나무 밑에 장판을 깔고 누워있는 노숙인들도 가족처럼 깨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노숙인의 대꾸를 선뜻 알아듣기 힘들어 물어보니 "매일 저분을 보니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단다. 또 다른 노숙인에게는 "주거지원, 말씀드린 거 상담 꼭 하셔야 된다"며 "술 먹지 말고 꼭 오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박 경위의 발길은 광장 구석구석을 훑었다. 평소 무릎이 좋지 않은 노숙인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몸을 직접 만지면서 '괜찮냐', '아프지 않냐'고 묻는 건 예사였다. 서울역 1번 출구 인근에 쓰러져 있던 남녀 노숙인 2명에게서는 용변을 본 듯 악취가 흘렀다. 박 경위는 "강OO 선생님, 가서 휠체어 가지고 나올게요. 여기 계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이동했다. '강 선생님'을 직접 들어올린 그는 정복에 용변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 경위는 해당 노숙인이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지 오래됐다는 말에 곧바로 광장 내 선별검사소로 향했다.
상태가 심각한 노숙인을 발견하면 병원에 급히 인계해야 하는 긴급상황도 발생한다. 실제로 이날 박 경위는 발의 상처가 곪은 응급환자를 이송하게 되면서 당일 예정된 대면 인터뷰를 하루 미루게 되기도 했다. 파출소 왼편 음식점 앞에 힘없이 앉아있었던 이 노숙인은 오른쪽 복숭아뼈에 '감각이 없다'고 했다.
박 경위는 "최근에 오신 분인데, 이분들이 옷을 걷거나 안 입고 바닥에 계시다 보면 아스팔트에 쓸리게 된다"며 "관리를 안하시니 '아, 상처났네' 이러시고 만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지난해 8월 천안에서 올라온 한 노숙인이 몸에서 고름이 나와 신체 일부를 절제한 이후 사망한 사례를 들며 "수술경과가 안 좋아 돌아가신 분도 있었으니 (가볍게 넘길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그가 서울역 파출소에 부임한 건 지난해 5월이다. 같은 해 2월 이러한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해보겠다'며 자원했지만, 상부에서는 50~60대 선임자들에 비해 나이나 계급이 미치지 못한다며 우려했다. 박 경위는 지난 2011년 생긴 노숙인전담경찰관의 세 번째 바통을 넘겨받았다. 선임자로부터 특별히 인수인계를 받은 바도, 업무 상 매뉴얼이랄 것도 없다 보니 초반에는 시행착오가 많았단다.
그가 스스로 녹록지 않은 자리를 자처하게 된 데엔 오래 전 기억도 한몫했다. "제가 경사 달고 다시 남대문경찰서로 왔는데 9년 전 순경 때 (서울역에) 계셨던 분이 또 계시더라고요. 너무 안타깝기도 하고, 도와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생각했죠. 근무 확정이 안 된 세 달 동안 주먹구구 식이 아니라 '이런 체계로 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왜 말을 거냐'며 대답도 않던 노숙인들도 박 경위의 이러한 진심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는 지난해 7월 중순 "박 경사, 나 이게 좀 필요한데 도와줄 수 없냐"며 50대 노숙인이 처음으로 상담과 도움을 요청해온 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박 경위는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는데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며 오셨다"며 "동사무소에 가려면 5000원이 있어야 하는데 그 돈이 없다 하시더라. 노숙인 인증을 하면 그 금액을 면제하는 정책을 알려드리고 함께 가서 만들어드렸다"고 회상했다. "그걸 보신 다른 분들이 그런 데 갈 때면 꼭 같이 가자고 저를 찾으시더라고요(웃음)."
'찾아가는 동사무소'(찾동)와 같이 광장 한가운데 파라솔과 의자를 설치하고 '찾아가는 파출소'를 시도하기도 했다. 노숙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파출소나 자신을 제집처럼 편하게 찾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다. 박 경위는 "지금은 코로나 감염우려 때문에 없어졌다. (코로나) 이후로는 '내가 찾아가면 되니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임 이후는 줄곧 코로나와 함께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7월 노숙인들에 대한 선별진료를 먼저 제안했다. 당시엔 확진자가 전무했지만, 지난해 12월 서울구치소·동부구치소 등 교정시설 내 집단감염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여기 계신 분들이 (가끔) 구치소에 갔다오시거든요. 서울구치소에서 나온 분이 계셔서 제가 검사를 받으시라고 설득했고 실제로 확진이 된 거죠. 지원센터에 이야기해 격리치료 조치하고 구치소 측에도 전수조사를 권유했어요."
박 경위는 노숙인 집단감염 당시 일부 언론에서 소재가 불분명한 노숙인들의 행적을 두고 '잠적'이라 표현한 데 대해 "그보다는 '못 찾은 것'"이라고 정정했다. "(언론 보도처럼) 도주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그분들이 악의가 있어서 '도망치자',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자' 했던 게 아니에요. 걸렸는지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전처럼 생활을 하신 건데 휴대전화나 주거지가 없어 찾기 어려웠을 뿐이죠."
박 경위는 "치료받으러 가시면 어떤 게 있고 추후 보상이 뭐가 있는지 정확히 얘기해드리면 다 가신다. 한 번도 거부하신 분은 없었다"며 "같이 가서 검사받으시고 확인하자 말씀드리면 다들 오래 살고 싶어하셔서 '빨리 가자'고 하신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완치판정을 받고 나서 피로회복제 음료나 바나나를 사들고 오는 이들도 종종 있다고 전했다.
박 경위는 지원대상의 근로가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데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주거지원 등을 통해 기초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된다. 공공근로가 조금 더 확장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드물지만 알코올 중독 등을 딛고 꾸준한 재활치료를 통해 자활에 성공한 사례도 있다. 박 경위는 "(취업 후) 직접 버신 돈으로 비타민 음료 한 박스를 사온 분이 계셨는데 너무 값졌다. 처음엔 아까워서 못 먹겠더라"며 "지금도 가끔 서울역 광장에 놀러 오시는데 여기 계신 분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이 되기 전 가정폭력 등 각종 상담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던 박 경위는 앞으로 여건이 허락된다면 이 일을 더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박 경위는 "처음에 '힘든 게 9, (좋은 게) 1'이었다면 지금은 힘든 수치가 훨씬 더 다운되고 행복지수가 더 높아진다"며 "노숙인도 국민의 일부 아닌가. 이분들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