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들 땅을 침탈해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어 나가는 백인들의 발자국은 지극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가져왔다. 이러한 침략의 역사는 승자가 된 백인 지배자들이 만들어 낸 프레임 안에서 포장되고 정당화된다. 잘 꾸며낸 이미지 안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야만과 폭력의 실체다.
20세기 초반, 중년의 사진작가 페드로(알프레도 카스트로)는 정체 모를 지주 포터의 결혼식 사진을 찍기 위해 설원으로 둘러싸인 세상의 끝 티에라 델 푸에고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페드로는 그곳에서 포터는 보지 못한 채 그의 어린 신부 사라를 만난다.
페드로는 소녀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신부의 사진을 찍으며 점차 그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집착하게 된다. 결국 페드로는 포터의 부하들에게 끌려가고, 그곳에서 자행되는 잔혹한 비극과 여러 사건을 겪으며 점차 피폐해져 간다.
영화는 제목처럼 하얀 설원 위 백인들의 원주민 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화이트라는 단어가 갖는 극명한 이중성이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눈보라 치는 설원이라는 자연의 냉혹함보다 탐욕으로 가득 찬 백인들의 사냥이 원주민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일 것이다. 원주민의 땅을 침략했음에도, 심지어 그들과 같은 인간임에도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도륙해야 할 사냥감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백인과 원주민 사이 침략의 역사를 자신의 눈과 또 다른 눈인 카메라를 통해 목격하고 뒤따르는 인물이 주인공 페드로다.
결혼식 사진 의뢰를 받고 티에라 델 푸에고로 온 페드로는 자신의 카메라 프레임 안에 자연과 예술적인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던 사진사다. 그러나 하얗게 물든 설원에서 펼쳐지는 백인들의 잔인하고 기괴한 폭력에 반강제적으로 물든다. 그렇게 점차 그의 프레임 안에도 폭력이 머물게 된다. 야만과 폭력조차 잘 꾸며진 프레임 안에 끼워 맞추지만, 그 프레임 바깥 진짜 세상은 더더욱 비참하고 무작위적인 폭력으로 가득하다.
카메라는 오래된 권력 문화이자 지배자의 시각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페드로가 어린 신부 사라를 자신의 카메라로 담아내고자 할 때,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지만 사라의 입장에서는 페드로의 예술적 만족을 위해 하나의 정물(靜物)로서 자신의 존재를 착취당한다.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카메라가 갖는 권력을 생각한다면 과연 사라에게 그것이 온전히 예술로만 다가왔을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사라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지배자와 권력자의 요구대로 포즈를 취하는데, 사실상 백인들에 의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침략당하고 목숨마저 빼앗기는 원주민과 다를 바 없다.
차별과 폭력의 모습을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재구성한다. '본다'는 행위 안에도 권력이 담겨 있고, 지배자의 시선이 녹아 있다. 일찍이 초상화 속 여성이 한 명의 존재가 아닌 움직이지 않는 물체처럼, 권력자의 시선에서 권력자가 재현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것이 때로는 남성의 권력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듯이 카메라 역시 마찬가지다.
마을의 지주이자 최상위에 위치한 권력자 포터는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진사는 카메라 프레임 안에 절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카메라 바깥에서 프레임 안에 위치한 것을 조종하고 원하는 대로 담아낸다. 이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용인들을 움직이고 원주민들을 지배하는 포터와 닮았다.
이름만으로 존재하고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포터는 어디에나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폭력과 차별의 가해자를 은유한다. 모습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본성 내지 속성은 바뀌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페드로의 예술에 대한 탐구와 욕구만큼 영화 역시 심미적인 감각을 충실히 드러낸다. 카메라는 잔혹한 비극 앞에서도 예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려는 페드로처럼 예술적 완성도를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영화의 이중적인 예술성은 영화가 다루는 잔혹하고 폭력적인 인간성을 아이러니하면서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동시에 사람들을 제대로 마주하기 어려운 참상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여러모로 지금 주목해야 할 영화이자, 곱씹어 봐야 할 작품이다.
100분 상영, 6월 10일 개봉,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