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제53조 '작량감경' 규정은 판사에게 유기징역 형기를 반 토막 낼 수 있는 재량권을 보장한다. 원칙적으론 실형을 벗어날 수 없는 피고인들까지 집행유예로 풀어줄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이다. '솜방망이 처벌', '유전집유 무전실형', '복불복 판결' 등 국민청원에 올라오는 단골 비판들의 밑바닥에는 견제 받지 않는 권력에 대한 불신과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지난 2019년 서울중앙지법 1심 형사사건 중 형법 제53조가 적용된 판결 925건(피고인 1020명)을 모두 분석했다. 작량감경은 얼마나 빈번하게 사용됐는지, 작량감경이 적용되는 합당한 기준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기준이 존재한다면 '국민들이 공감하는 정의'에 부합하는지 면밀히 살펴봤다. [편집자 주]
'작량감경 대해부' 글 싣는 순서 |
①日천황서 기원한 판사의 권력…묻지도 따지지도 못해 ②지적장애 신도 성폭행 목사, '재범'에도 작량감경 ③피고인 엄마 사죄에 '작량감경'...'진지한 반성' 맞나 ④변호사 사야 작량감경↑…커지는 법정 빈부격차 ⑤'판사 견제하라' 만든 양형위, 작량감경 부추기나 ⑥10년 넘게 중범죄 절반 '작량감경'…입법·사법 서로 네탓 ⑦[법정B컷]"그 양형은 틀렸다" 14년 만의 法내부 비판 |
"국회에서 법정형은 그 범죄의 가장 전형적인, 나쁜 모습을 상정하고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법정에서 실제 사건을 보면 많은 경우 그 정도는 아니고 또 양태도 너무 다양한 거죠…."
최근 10년간 1심 중범죄(형사합의부) 사건의 절반 이상이 작량감경돼 왔다는 CBS노컷뉴스 취재 결과에 대해 A 부장판사는 이같이 답했다. 그는 단독과 합의부, 1·2심 등 형사법정에서만 총 10년가량 근무했다.
A 부장판사는 "똑같은 강제추행인 경우에도 여성의 성기를 만진 경우, 팔이나 등을 만진 경우가 다르고 옷 위로 만졌는지 속으로 만졌는지에 따라 죄질이 달라진다"며 "법정형 하한선은 그 중 가장 나쁜 형태를 두고 최소한 이만큼은 처벌하라고 규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법정형의 하한이 너무 과중하다는 의미다.
◇선고 시 '지표'인 양형기준 권고형 하한, 법정형의 70%25 수준까지 떨어져
이러한 실무자들의 고민은 대법원 양형기준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양형기준은 범죄유형별로 지켜야 할 형량범위와 형의 가중·감경인자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데 기본적으로 '감경-기본-가중' 3개의 구간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 '기본구간'의 하한은 대체로 법정형 하한 보다 낮게 설정돼 있다. 법정형이 그리는 해당 범죄 죄질의 전형적인 모습과, 양형기준 생각하는 모습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재량을 다소 제한하는 차원에서 양형기준이 등장한다. 특별한 감경인자가 있는 경우 '감경구간'에 해당하는 선고형을, 특별가중인자가 있으면 '가중구간' 내의 형을, 별다른 인자가 없거나 가중·감경인자가 동수로 있는 경우 등이면 상쇄해 '기본구간' 내에서 형량을 정하게 된다. 뇌물죄 양형기준 중 뇌물 액수가 1억원 이상 5억원 미만인 경우 기본구간은 7년~10년이다. 특별가중·감경인자가 없는 평이한 사건이거나 가중·감경인자가 모두 있어 상쇄되는 경우에 기본구간 내에서 선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법정형보다 하한이 3년이나 낮다. 법에서는 공무원이 1억원을 받으면 최소 10년을 선고하라고 하는데, 양형기준은 7년을 선고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양형기준대로 선고하려는 판사는 법에 정해진 하한인 '10년'을 일단 무너뜨려야 한다. 따라서 법정형 절반을 깎는 작량감경을 적용해 하한을 5년으로 낮춘 후에야 기본구간인 7~10년 내 형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양형기준은 권고사항일 뿐 강제력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판사들의 양형기준 준수율은 2019년 기준 90.7%다. 사실상 권고사항이 아니라 하나의 법기준처럼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 아동청소년에게 성매매 행위를 권유하며 대가를 받는 행위는 법에서 7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못 박고 있는데, 양형기준에선 4년 6월부터 선고해도 된다며 무려 2년 6월을 낮추고 있다.
◇법정형 무력하게 만드는 양형기준 괜찮나
물론 법정형이 언제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법률상 정해진 여러 감경인자가 적용되는 경우에도 법정형은 하한은 깎일 수 있다. 범죄자가 14세 미만인 경우(형사미성년자), 심신장애인인 경우, 범행 도중 스스로 중단한 경우(중지범), 타인의 범죄를 방조한 경우(종범) 등이다. 정당방위가 인정되거나 수사기관에 자수했을 때, 범행이 미수에 그쳤을 때에도 판사의 판단에 따라 법정형 하한을 절반으로 낮출 수 있다.
국회가 법정형을 높여놨다고 해서 구체적인 사정을 무시하고 엄벌만 강조하는 것도 정의가 아니다. 다만 작량감경은 어떤 구체적인 사정이 있을 때 쓰이는 것인지 위의 법률상 감경사유처럼 드러나는 기준이 전혀 없고, 추후 판결문을 통해서도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미지의 권력'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양형위 고위 관계자는 "작량감경은 재량이 핵심이다. 어떤 기준을 붙이면 결국 작량감경 폐지를 말하는 것이 된다"며 "특별감경인자가 있을 때만 작량감경할 수 있도록 권고범위를 정하게 되면, 법도 아닌 양형기준이 마치 법에 준하는 효과를 가지게 되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같은 양형위의 태도는 양형기준이 권고에 불과하다는 현실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양형기준이 제시하는 최저형량이 법정형과 일치한다고 해서 판사들이 현행법상 엄연히 존재하는 작량감경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판사들이 양형기준을 벗어나 선고하는데 있어서 더욱 신중한 판단을 하도록 유도하는 심리적 방어벽 역할을 할 뿐이다.
또 'N번방 사건' 등으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아동청소년성착취 범죄 등 일부 범죄군의 경우 양형기준 기본구간 하한이 법정형과 같도록 설정돼 있다. 자본시장법상 증권범죄나 불법촬영물을 이용한 협박·강요 범죄 등도 마찬가지다.작량감경의 핵심은 재량권이라면서도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고 있는 일부 범죄에 대해서는 선별적으로 재량권을 제한하고 있다. 양형위의 입장도 일관되진 않은 셈이다.
◇2007년 양형위 최우선 목표 "사법신뢰 회복위한 양형기준 마련"
2007년 양형위의 출범 목표를 고려하면 작량감경 가능성을 미리 고려해 양형기준 구간을 설정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양형위원회 초기 위원으로 활동했던 성낙송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양형기준은 판사의 재량권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진 게 결코 아니며 항간의 편차 시비를 충분히 잠재울 수 있을 것" 이라고 강조했다.
성 전 부장판사의 발언에는 양형위 출범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녹아 있다. 들쑥날쑥 했던 양형 편차, 재벌과 일부 기득권층에 대한 관대한 양형으로 법원에 대한 국민들의 지탄이 높아지고 있던 때였다. 양형위가 출범 후 일반인 1000명을 대상으로 양형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73.9%가 양형에 일관성이 없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14년이 지난 지금, 양형기준이 과거 이 대법원장의 당부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답을 내놓았는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법조계는 물론 법관 사회 일각에서도 양형기준이 피고인을 비롯한 국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판사의 편리한 판결을 위한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양형기준이 있는 미국과 영국 등의 준수율은 50% 내외에 불과하다. 양형기준을 적용할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을 구분해 적극적으로 형을 선고하고 그것에 대한 이유를 충분히 밝혀야 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양형기준을 지켰다는 것을 핑계삼아 판결문을 대충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CBS노컷뉴스가 2019년 서울중앙지법 형사 1심에서 작량감경이 적용된 925건(피고인 1020명)을 전수분석한 결과, 작량감경 행사의 이유를 별도로 명확히 서술한 판결은 6.4%25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작량감경을 하면서도 "아래 유리한 양형이유를 참작한다"고 대체한다. 중범죄(합의부) 사건의 경우 그나마 양형이유가 대부분 기재돼 작량감경의 근거를 추정해볼 수 있지만, 단독재판부 사건의 경우 작량감경이 적용된 570명 중 83명(14.6%)의 판결문엔 아무런 양형이유도 적히지 않았다.
독일 등은 법률에 따라 양형이유가 판결문에 구체적으로 명시되기 때문에 선고형이 부당한 것 자체는 물론 그 양형이유가 부적절하다는 점도 상고이유가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 등 매우 중한 형이 선고된 일부 사건을 제외하고는 양형을 두고 대법원의 판단을 받을 수 조차 없도록 돼 있다.
◇작량감경 개정 시도됐지만…"누구도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법무부가 추진한 형법 일부 개정 법률안(2011년) |
제49조(정상감경) ① 범죄의 정상(情狀)에 참작할 만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 이 경우 다음 각 호의 사유가 여러 개 있더라도 거듭 감경할 수 없다. 1. 범행의 동기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경우 2.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아니하는 경우 3. 피고인의 노력에 의하여 피해자의 피해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이 회복된 경우 4. 피고인이 자백한 경우 ② 정상감경에 관하여는 제48조제1항을 준용한다. |
이같은 작량감경의 문제가 바뀔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1년 법무부는 전반적인 형법개정을 추진하면서 작량감경에 일정한 기준을 넣는 개정을 시도했다. △참작할만한 범행의 동기 △피해자의 처벌불원 △피해 회복 △피고인의 자백을 기준으로 둔 것이다.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도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따라 법률이 미리 정해놓은 형벌의 범위가 법관이 양형재량에 의해 좌우돼 법률효과를 불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며 "작량감경의 사유를 법률로 구체화하고자 하는 개정안의 취지는 타당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개정 작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대법원은 "작량감경을 개정안과 같이 고치기 전에 우선 법정형의 하한을 2배 가까이 낮춰야 하고 구체적 감경사유를 더 늘려야 하며 감경의 폭도 넓혀야 한다"며 사실상 반대 의견을 냈다. 작량감경에 제한을 가해 기존처럼 자유롭게 법정형 하한을 낮출 수 없게 되면, 현행 법체계에서 당장 많은 피고인들이 구체적 사건에 맞지 않는 지나친 엄벌의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개정이 수포로 돌아간 후 법무부는 지난해 말 형법 전반에 걸쳐 어려운 용어를 순화하는 차원에서 '작량감경'을 '정상참작감경'으로 바꾸는 작업만 했을 뿐 내용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법부 역시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해온 법정형의 하한을 없애는 등 형사법 체계 전반을 수정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특별히 찾기 어렵다.
개정 작업에 참여했던 한 법조인은 "사실 법조인 누구도 작량감경이 개정되길 원치 않을 것"이라며 "판사는 자신의 재량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고 변호사도 변론이나 재판부와의 친분을 통해 통해 피고인의 형을 낮출 도구를 원한다. 검사는 구형까지가 자기 책임일 뿐 선고형량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