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7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소송 선고 中 |
오후 1시 58분: 재판부 입정 재판장(김양호 부장판사) "판결문이 좀 길어서요. 결론만 말하고 판결문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자들에게는 보도자료를 공보관실 통해 보내겠습니다. 개인의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에 의해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됐다곤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할 수는 없다는 결론입니다." 주문 이 사건 소를 모두 각하한다.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소송 모두 각하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오후 1시 59분: 재판 종료 |
6년의 기다림에 대한 법원의 답을 듣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은 소송의 요건조차 채우지 못했다는 의미의 '소 각하'.
선고는 짧았지만 판결의 파장은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고 하루 뒤에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이 사건 판결을 한 재판장에 대한 탄핵 청원글이 올라와 하루 만에 20만명의 동의를 받는가 하면 여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는 "도대체 어느 나라 법원이냐"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외부의 반응만도 아닙니다. 통상 타 재판부의 판결에 언급을 삼가는 법원 내부에서도 이번 강제징용 판결을 두고는 꽤 당황스럽다는 목소리들이 상당합니다. 일선 법원 직원이 내부망에 "판결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이 판결은 좀 심한 것 같다"는 글을 올리고 현직 법원장이 "난센스"라며 판결의 주요 근거를 반박하는 댓글을 다는 이례적인 '판결 품평'도 있었습니다.
직원의 말마따나 "법원의 판결이 존중받아야한다"는 건 구태여 설명할 필요 없이 법치주의 사회에서는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번 판결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현상은 무엇 때문일까요?
21.6.7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소송 판결 中 |
위와 같은 법리를 토대로 이 사건에 관하여 보건대,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 잡은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법적인 법 해석이다. 일본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였다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그 불법성이 인정된 바가 있다는 자료가 없다. 그 당시 즉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의 약소국 병합이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주장은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실정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중략)…결국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선고 2013다61318 전원합의체 판결 등은 국내 최고재판소의 판결이지만 위와 같은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잡은 징용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바, 이와 같은 판결 등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단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한 것으로, 이러한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식민지배의 적법 또는 불법에 관하여 상호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일괄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 등에 관하여 보상 또는 배상하기로 합의에 이른 '조약'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는 앞서 본 바와 같은 청구권 협정에 구속된다. |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이에 터 잡은 징용의 불법성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국내법적인 법 해석이다" 판결 곳곳 의아한 언급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파장이 큰 대목은 이 부분일 겁니다. 강제징용이 국내법을 떠나 국제법적으로 보면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내용 자체는 물론, 3년 전 대법원이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며 확립한 판례와 정반대의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18.10.30 대법원 고(故) 여운택 등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제철 상대 손배소 판결 中 |
구 일본제철의 원고들에 대한 행위는 당시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들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중략)따라서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청구권협정 제5항)에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까지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판단에 참여한 대법관들의 다수 의견(7명)에 따라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 개인이 입은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이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고 일제시기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합의인 청구권협정이 이뤄졌다고 해서 일제 시기의 불법 행위로 인한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까지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주된 근거입니다.
통상 대법원에서 확립된 판례가 향후 유사한 쟁점의 하급심 소송에서 판단 기준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유사한 정도가 아닌 사실상 완전히 같은 쟁점에 대한 판례를 따르지 않은 이번 재판부의 결정은 그 자체로 이례적입니다. 물론 대법원의 판례를 다른 사건에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례적이라는 자체가 비판 대상은 아닐 겁니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판결에서 비친 재판부의 사건에 대한 인식입니다. 단어 그 자체에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질서 위반의 내용이 가득한 일제'강점'기의 '강제'징용이 국제법적으로 판단될 기회조차 없었는데 불법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 사안이 국내법이 아닌 국제법을 따라야 할 사안인지는 차치하고라도 말이죠.
18.10.30 판결 中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의 반대의견 |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가한 고통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이 피해자들에게 한 보상이 매우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중략)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도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은 피해국민의 소송 제기 여부와 관계없이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할 책무가 있으며 이러한 피해국민에 대하여 대한민국이 소송에서 그 소멸시효 완성 여부를 다툴 것도 아니라고 본다. |
더군다나 이번 재판부는 마치 이 판결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듯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소수의견을 언급했지만 사실 이 소수의견보다도 한참 후퇴한 판결로 보입니다. 당시 권순일·조재연 두 대법관은 "일본이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가한 고통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이 피해자들에게 한 보상이 매우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고 적었습니다. 일제강점과 강제징용이 법질서에 위반된다는 점은 인정하는 것이죠. 아니 정확히는 '인정했다'기 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상 법리적으로 따질 이유도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판결 구석구석 문제 소지가 있지만 이는 재판부의 고유 권한에 관한 것이니 넘어가더라도 정말 본질적인 문제는 이 판결을 선고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사건 소송의 선고는 지난 7일 오전 9시 전까지만 해도 오는 11일 오후 2시로 예정돼있었습니다. 그러고는 당일 오후에 선고를 진행하겠다고 급작스럽고도 일방적으로 재판부는 일정을 앞당겼습니다. 판결문 작성의 시간이 걸리거나 재판부 간 합의에 이상이 있는 등으로 선고가 미뤄지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선고기일이 앞당겨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민사재판에 소송 당사자가 재판에 출석하는 게 의무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재판에 참여할지 말지를 선택할 권한은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이 사건 원고들 상당수가 이 사건 재판이 열린 서울에서 먼 곳에 거주하고 이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많습니다. 각자의 사정까지도 고려하면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재판에 참석할지 결정할 시간은 채 5시간도 안 된 셈이죠. 사실상 당사자의 재판 참여권을 박탈한 결정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21.6.7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소송 판결 설명자료 中 |
○ 이 법원은 헌법기관으로서 헌법과 국가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을 수호하기 위하여 위와 같이 판결할 수밖에 없었음 ○ 선고기일 변경은 당사자에게 이를 고지하지 않더라도 위법하지 않은 바(대법원 63다851, 62다567, 2001다14023 판결 등), 이 사건은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판결선고기일을 변경하고, 소송대리인들에게는 전자송달 및 전화연락 등으로 고지하였음 ○ 변론속행을 구하는 당사자들이 있으나 이 판결 결과는 민사소송법 제219조에 의하여 무변론 소 각하도 가능한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았음 |
그 변경사유는 더욱 황당합니다. 판결 선고하면서도 밝히지 않고 이후 설명자료로 알려진 그 이유는 바로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관심과 향후 논란을 의식한 듯 "당사자에게 이를 고지하지 않더라도 위법하지 않다"는 ‘세심한 배려’까지 덧붙였습니다.
재판의 당사자들은 기다리던 결과 나오지 않으면 판사 자신들과 달리 당장 소란을 일으키고 폭력으로 법정의 평온과 안정을 깰 문제적 존재들로 본 것일까요? 최근 최소 이 서울중앙지법 재판들을 1년 반 가까이 취재하면서 어떤 중요하거나 민감한 사건 재판에서 실제로 재판부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하는 그 정도로 불미스러운 일은 거의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죠.
이유가 어찌 됐든 결국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던 이유는 아마 이 법정의 주인은 재판부 자신이라는 인식에서 온 것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어떤 악의가 설령 없더라도 소송 당사자가 아닌 자신들의 편의만 고려한 선택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사실 스스로 더 잘 알겠지만 이 재판의 당사자는 판사들이 아니라 소송을 청구한 원고인 강제징용 피해자 그리고 소송을 당한 피고인 일본기업들입니다. 사실상 피고 측은 2015년 소송이 제기된 후 6년 동안 참석을 미루다가 변론 없이 선고를 진행하겠다는 통보에 마지못해 사실상 끌려 나온 점을 고려하면 당사자성이 더욱 짙은 쪽은 강제징용 피해자 쪽일 겁니다.
법적 판단은 재판부의 몫이더라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이 재판의 당사자라는 최소한의 인식이라도 있었다면 법정의 평온과 안정이 깨질 것을 차마 우려했더라도 당사자들이 사실상 참석할 수 없도록 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할 법원의 판결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은 현상이 벌어지는 일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최소한 '판결의 존중'이 당연하게 지켜지기 위해서라도 재판부가 먼저 '법정의 주인'에 대한 존중을 보여야 했던 것 아닐까요? '법정의 평온'을 위했다거나 위법한 것은 아니라는 변명이 아니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