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 오이디푸스 변주곡…비극을 넘어선 '크루엘라'
이진욱 기자(이하 이) : 남작부인과 그 딸 크루엘라의 관계를 오이디푸스 비극의 변주로 봤다. 출생의 비밀을 가진 주인공이 이를 알았을 때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인 까닭이다. 크루엘라는 엄마에게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닌 사회적 죽음을 안긴다. 어머니가 시대와 체제에 순응하면서 개인을 희생하고, 생물학적인 2세를 버림으로써 꿈을 실현하고자 악역이 돼야 했던 상황을 크루엘라는 한 번 더 극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이디푸스 비극 흐름에 따라 출생의 흐름 알고 나서 기성 세대를 극복하는 과정이 영화 속 진보하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은 아닌가 싶다.
최영주 기자(이하 최) : 사실상 막장극이다. 그런데 막장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 비극이 있다. 그런데 '크루엘라'는 보통 고대 그리스 비극이 갖는 비극성을 따라간 게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극성을 극복한다. 보통 이런 영웅 서사를 보면 오이디푸스의 변주가 많다. 출생의 비밀과 죽음의 위기나 어떤 위협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으며 영웅이 된다. 남작부인은 여성이 사회 진출을 하기 어려운 시기,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자 아이를 버리는 비극을 가져가며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크루엘라는 비극에 짓눌리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비극을 비틀어 이겨낸다. 여기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 : 고대 그리스 신화의 목적과 역할은 공동체의 융화, 응집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안 뒤 두 눈을 뽑고 황야에 나가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그 장면을 보는 당시 그리스 관객들은 우리 공동체의 붕괴가 초래할 혼란, 인간 존재의 비극성 등에 관한 경각심을 가졌을 것이다.
지금의 오이디푸스 변주곡들을 보면 그 목적은 극복에 있는 것 같다. 기성세대나 기성 체제를 극복하고 어떻게 더 나아가야 하는지 말한다. 이 영화에서도 약자들의 연대라는 측면에서 보면 도둑들, 하층민,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연대가 결국 기성 체제, 남작부인이 일궈 놓은 세상을 전복시킨다. 마지막에 가서 그들이 하나의 팀으로 엮이는 장면으로 끝을 낸다. 쿠키 영상을 보면 그 연대의 영역이 더 넓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1960, 70년대 유럽 등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으로 초토화된 세상을 재건하면서 경제적 부흥을 이룬 시기다. 사회주의라는,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또 다른 체제가 현실 세계에서 힘을 발휘했고, 1980, 90년대 신자유주의 체제로 그것이 무너지는 시대를 겪었다. 그 이후 모순, 불평등, 양극화는 증폭됐다. 그런 차원에서 60, 70년대 이야기들이 꾸준히 소환되는 걸 보면, 현재 우리 시대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 같다.
크루엘라도 혼자였다면 비극으로 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주변과 연대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기존 체제와 달리 새로운 흐름을 이야기한다. 그 존재 자체로서 말이다. 기존 체제에 순응하던 인물을, 종결을 상징하는 무덤으로 보내고 난 뒤 크루엘라가 무덤 앞에서 이야기한다. 새로운 선언을 한 거다. 그 옆에는 그의 가족과도 같은 두 친구가 있다. 그런 여러 측면에서 봐도 남작부인과의 대결 등 영화 안에서도 새로운 체제는 혼자만이 나아갈 길이 아니라 대다수 사회적 약자와 연대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영화 밖에서도 그동안 이야기의 흐름들, 그리스 비극이나 사회적·역사적 흐름 속에서 우리만의 방식으로 저항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 체제가 가졌던 저항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물들이 가진 새로운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이 기존 디즈니 IP와 그리스 비극, 그리고 영화 내부적으로는 크루엘라라는 인물을 통해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 : 남작부인과 에스텔라가 갈라지는 지점이 거기였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크루엘라는 남작부인이 자기 엄마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침대에 누워서 분노의 5단계를 말한다. 거기에 '복수'라는 개념을 추가한다. 남작부인을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뚫고 나가고 세상에 대한 저항의 방식으로 주변 사람을 쳐내고 주변 사람 공도 자기 걸로 가져온다. 크루엘라도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복수 선언 이후 동료를 배제하고 독선에 사로잡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행착오를 겪다가 결국에는 동료를 구하고 연대함으로써 저항하는 쪽으로 발전한다. 복수의 방식에서 크루엘라는 남작부인과 극명하게 다른 길을 간 셈이다.
최 : 영화를 이끌어 가는 두 엠마, 엠마 스톤과 엠마 톰슨의 연기는 어떻게 봤나.
이 : 엠마 스톤은 정말 물이 올랐다. 엠마 톰슨과 같이 있는 대결 장면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기 빛을 발하는 에너지를 갖고 대등하게 아우라를 풍긴다. 이를 보면서 할리우드 연기파 배우 계보 안에서 든든한 대들보로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 '라라랜드'에서도 잘 했지만 이렇게까지 더 발전하고 잘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라라랜드'에서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연기를 보여줬고, '크루엘라'에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진가를 보여준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게 타이틀 롤인 크루엘라를 맡은 엠마 스톤이지만 사실 남작 부인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만큼 강렬하고 독특한 캐릭터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역이 중요한데, 남작부인이 있기에 크루엘라가 더 빛나게 된다.
엠마 톰슨은 정말 연기를 잘하는 대배우이고, 극 중 남작 부인 캐릭터도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닌 철의 여인이다. 여기에 눌리거나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연기를 했다는 게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엠마 톰슨도 적당하게 리듬을 타면서 잘 받쳐줬고, 서로서로 균형을 맞춰가며 연기했다.
이 : 앞서 언급한 영화 '조커'에서 로버트 드니로는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완성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인물이다. 조커를 조커로 완성시키는 조력자로서 드니로가 있었다면, '크루엘라'에서도 크루엘라를 완성시키는 조력자로서 남작부인이 존재한다. 호아킨과 드니로라는 걸출한 명배우의 만남만큼이나, 두 엠마의 시너지도 컸다. 극찬을 받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라는 캐릭터가 떠오를 만큼, 엠마 스톤의 연기는 크루엘라라는 인물에 확실한 색깔을 넣었다. 과거 로버트 드니로와 엠마 스톤으로 대표되는 이전 세대 명배우 계보를 호아킨 피닉스와 엠마 스톤이 이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최 : 디즈니가 주인공을 빛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했던 빌런들을 계속 재해석하고 있다. '말레피센트'에 이어 '크루엘라'로 왔는데, 디즈니는 우리가 알고 있던 빌런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캐릭터로 재창조해 그들에게 서사를 부여한다. 특히 전형적인 영웅 서사에서 벗어난 안티 히어로로서 재탄생시키고 있다. 말이 안티 히어로지만,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안티 히어로인 거다. 기존 규범과 틀에 저항하는 안티 히어로 말이다.
디즈니가 디즈니를 뒤엎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디즈니의 상식적인 빌런을 뒤집었는데, 단순하게 어떠한 사연을 지닌 빌런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요즘 디즈니가 추구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끼얹어 재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계속 사회에 목소리 내는 것 같다.
그리고 '말레피센트'는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인간 외 존재였는데, '크루엘라'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이다. 현실의 존재인 크루엘라가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고 저항하려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의미 있는 재해석이라 볼 수 있는 것 같다.
악역의 재해석이 악인을 미화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건 그 시대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빌런의 재해석으로 메시지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전달하는지에 따라서 시대상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해석 역시 더욱 확장시킬 수 있다. 이런 흐름에서 디즈니가 실사영화 제작을 발표한 '인어공주'에서 빌런 우르슐라를 어떻게 해석할지도 궁금하다.
최 : 중요한 건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악역, 반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악역이 아니라 우리가 분명 타파해야 할 문제적인 사회 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의미로서의 악역으로 변화한다는 지점이다. 우리가 다시 한번 깨뜨리고 나아가야 할 고정관념, 문제적인 체제를 향한 빌런이다. 그런 점에서 보다 현실적인, 현실의 우리를 위한 안티 히어로다.
이 : 사실 이건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데, 빌런들의 재해석을 악역의 미화로 받아들이는 건 초점을 벗어난 비판으로 다가온다. 그간 인류가 권위적인 체제 유지를 위해 공동체의 모순을 숨기고 모든 걸 개인 탓으로 돌렸다면, 우리 시대는 사회가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 끼치는지, 소수 기득권층이 우리를 어떻게 억압하려 하는지를 직시할 수 있는 눈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빌런의 재해석들이 '너의 탓'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위로나 비판적 시각을 주는 촉매로서 작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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