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3점 오케이야. 3점 오케이"
2014년 1월8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프로농구 부산 KT와 창원 LG의 정규리그 경기는 상위권 팀들의 맞대결답게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LG는 28득점을 올린 데이본 제퍼슨을 앞세워 KT 수비를 공략했다. 종료 9.3초 전에는 LG 가드 김시래가 골밑 레이업에 이은 추가 자유투를 성공해 스코어를 85대83으로 뒤집었다.
지금은 전주 KCC 지휘봉을 잡고 있는 전창진 당시 KT 감독은 작전타임을 불렀다.
KT는 주축 외국인선수 아이라 클라크가 5반칙 퇴장을 당한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기량이 떨어지는 커티스 위더스가 코트에 남았다. KT는 2점슛을 넣어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가더라도 제퍼슨이 버티는 LG에 밀릴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령탑 입장에서는 확률높은 2점 공격을 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조성민이 과감하게 전창진 감독의 말을 끊었다.
'조선의 슈터'로 불리던 조성민은 3점슛 한방으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전창진 감독은 3점슛을 쏴도 괜찮냐는 조성민의 갑작스런 제안에 깜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전창진 감독 역시 승부사였다. "3점 오케이"라는 말로 간판 슈터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조성민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코트에 나섰다.
조성민은 오른쪽 베이스라인 방향으로 돌아나왔고 위더스가 스크린을 제대로 걸었다. 이때 톱에 있던 전태풍이 조성민에게 정확하게 패스를 건넸다.
조성민의 손을 떠난 공은 종료 3.3초를 남기고 깨끗하게 림을 통과했다. 박래훈의 슛 동작 반칙이 있었지만 '조선의 슈터'는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회심의 3점슛을 터뜨렸다.
조성민은 추가 자유투까지 성공했고 KT는 극적인 87대85 역전승을 거뒀다.
패배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자신의 주무기로 경기를 끝낼 수 있다고 확신한 에이스, 선수를 믿고 자신의 전략을 수정해 힘을 실어준 사령탑, 완벽한 팀 플레이 그리고 화려한 위닝슛까지.
이 장면은 프로농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전타임 중 하나이며 KBL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1997년 프로농구 출범 이래 수많은 선수가 KBL 무대에 데뷔했고 또 코트를 떠났다. 그 중에서 이름을 떠올렸을 때 곧바로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선수는 많지 않다.
팬들의 기억 속에 '조선의 슈터'라는 이미지를 깊게 새겨놓은 장면이기도 하다.
조성민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농구 인생을 꽃피웠다.
대회 전까지만 해도 '조성민 = 슈터'라는 이미지가 뚜렷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성민은 준결승과 결승에서 고비 때마다 3점슛을 터뜨리며 차세대 국가대표 슈터로 주목받았다.
조성민의 진가는 2011년 중국 우한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 필리핀과 3-4위전에서 빛을 발했다.
조성민은 런던올림픽 최종 예선 티켓이 걸린 승부에서 4쿼터에만 3점슛 3개를 성공하는 등 20득점을 올려 70대68 역전승을 이끌었다.
대표팀은 양동근과 하승진의 부상으로 100% 전력이 아니었고 4쿼터가 시작할 때 11점 차로 끌려갔지만 조성민의 눈부신 활약으로 승부를 뒤집을 수 있었다.
이후 조성민은 화려한 국가대표 슈터 계보를 잇는 선수가 됐다.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정점을 찍었다. 조성민은 필리핀과 8강전, 일본과 준결승전, 이란과 결승전에서 연이어 두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남자농구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유재학 울산 현대모비스 감독은 당시 조성민에 대해 "장신 선수들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자기 밸런스를 유지하며 슛을 던졌다"며 그의 배짱을 높게 평가했다.
국제대회에서 자신보다 큰 상대와 집중 견제를 극복한 조성민은 프로농구 무대에서 자신이 쌓은 경험을 실력으로 발전시켰다.
조성민은 2010년대 들어 두 차례나 리그 베스트5에 이름을 올렸다. 2013-2014시즌에는 평균 15.0득점, 2.8어시스트, 3점슛 성공률 45.4%(평균 2.2개 성공), 자유투 성공률 89.9%를 올리며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2006년 KBL에 데뷔한 조성민은 통산 800개의 3점슛으로 이 부문 역대 14위에 올라있다. 성공률은 39.0%로 통산 3점슛 500개 이상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 10위다.
자유투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3시즌 동안 자유투 성공률 89.1%를 올린 조성민은 통산 50개 이상의 자유투를 기록한 선수 가운데 압도적인 역대 1위다.
2011년부터는 4년 연속 리그 자유투 성공률 1위를 차지했다. 2012-2013시즌 조성민(91.9%) 이후 규정 순위에서 90%가 넘는 성공률을 기록한 선수는 없다. 프로농구 최다인 자유투 56개 연속 성공 기록도 조성민이 갖고 있다.
이처럼 프로농구와 한국 남자농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조성민이 정든 코트와의 작별을 선언했다.
조성민은 24일 소속팀 창원 LG를 통해 "구단과 주위의 많은 분들이 아쉬워 하지만 가족과 상의 끝에 후배들을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 응원해 주신 팬들의 사랑을 평생 간직하며 살겠다"며 은퇴를 발표했다.
어린 시절 조성민의 꿈은 소박했다. 프로농구에서 연봉 1억원을 받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 목표를 이룬 뒤에도 계속 땀을 흘렸다. 어느덧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게 됐고 KBL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조성민이 데뷔할 당시 그는 '성실한 선수'로 통했다. 장신 숲을 뚫고 던지는 3점슛처럼, 조성민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제는 그가 코트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이름 앞에는 '조선의 슈터'라는 수식어가 달린다. 코트 안팎에서 흘린 땀의 결실이다. 이처럼 멋진 별명을 가진 농구선수가 또 나올까.